15. 흑두루미, 푸른 잉어 그리고 붉은 뱀

살고싶어졌다.

by 은송하

심퉁거리던 하녀가 밖으로 나가자 지우는 하영의 머리에 베개를 받혀서 눕게 하고 얼굴을 장미수로 닦아 주었다.


“아씨. 이것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위에 면포와 한지를 올리겠습니다.”


“좋은 향이 나는구나.”


“이르게 핀 장미꽃을 구해 물을 우렸습니다.”


지우는 하영의 얼굴에 면포와 한지를 올리고 그 위에 조합한 것을 올려 펴 발랐다.


“시원한 것이 기분이 좋구나. 잠이 오는 것도 같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시면 기분이 훨 좋아지실 겁니다. 이각(二刻. 30분) 후에 떼어내겠습니다. 괜찮으시면 팔과 다리를 주물러 드려도 되겠습니까? 손바닥 발바닥을 지압해 기와 혈이 돌게 하는 것도 할 줄 압니다.”


하영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넌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어.”


“저에게 딸린 식구들이 있으니 굶어 죽으면 안 됩니다.”


지우는 딸린 식구들 얼굴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덕유산에 약초 캐러 간다고는 했지만 천지에 널린 취나물이나 잔뜩 지고 올지도 모르는 아버지 백단과 팔랑귀에 사기까지 당해놓고 편하게 성균관을 다니며 대제학과 바둑을 두는 사이라 허세를 부리며 사는 똥멍청이 오라버니 성우, 가련한 끝명이.


지우는 눈이 시큰해지려는 걸 겨우 참고 지압봉을 꺼내 하영의 손바닥에서부터 어깨로, 발바닥부터 허벅지로 현란하게 혈을 누르며 피부를 쓸어 안마를 해주었다.


하영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요 며칠 개운하게 잠을 못 잔 것을 만회할 정도로 꿀잠을 잤다. 한 시진쯤 흘러 하영이 일어나는 기척을 보이자 지우가 입을 열었다.


“아씨.”


“말해 보아라.”


하영은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여기며 거칠지만 반가운 음성으로 답했다.


“사실 저는 좌승지 영감이신 신유진 나으리가 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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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의 사지가 사르르 떨렸다. 흑두루미 주전자를 보고 혹여 하였다. 손을 주무르던 지우의 손끝에 하영의 식은땀이 잡혔다. 한양으로 이사 오던 날이었다. 짐을 나르던 인부가 하는 말을 들었었다. 집 앞 소란당이라는 책방에 신유진 영감이 들어가는 걸 봤다고 말이다. 가슴이 뛰었다. 저를 보러 온 건 아닌가 기대를 했었다. 초상화로 본 그는 사내의 기개가 넘치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어찌 그분이.”


“아씨. 얼굴을 쌀뜨물로 씻어내시면 화장품을 발라드리겠습니다. 그 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우는 하영의 얼굴에 있는 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화장품을 발라주었다.


“이것도 드셔 보십시오. 피를 맑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는 약재와 식재료를 달여 만든 음료입니다.”


하영은 지우가 건네는 것에, 자세히 묻지도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신랑이 될 유진이 보낸 사람이라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단 듯도 고소한 듯도 하며 입맛에 맞았다.


“신기하구나. 입에 쓰지 않아. 네 덕분에 기분도 좋아지고 몸도 한결 나은 듯하다. 고맙워.”


“이렇게 하시면 내일 분과 연지를 바르실 때 더 곱게 될 것입니다.”


“내가 몸이 이러한데 분과 연지를 바를 날이 있을까? 혼롓날에 연지 곤지를 찍을 수 있을까?”


“그럼요 아씨. 영감님은 아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면목 없다고 전해주게.”


하영은 닭똥 같은 눈물을 툭하고 떨어뜨렸다.


“영감께서는 아씨가 아픈 것이 영감을 노리는 사특한 자들의 짓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계십니다.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누군가가 만든 질서이고 누군가의 집념이자 집착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우는 유진이 준 유진의 가문의 표식인 흑두루미 옥패를 하영에게 건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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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그 옥패를 물끄러미 보았다. 조선 땅에서 이 흑두루미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장 숙원이 세 가문에게 신비로운 세 동물의 그림을 내어주며 복을 빌었다고 했다. 대제학 신준성에게 흑두루미, 영의정 권도윤에게 푸른 잉어, 대비 윤씨, 윤명헌에게 붉은 뱀 그림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 세 가문을 삼상(森祥)이라 불렀다. 삼(森)의 제일 위 나무가 누구인가는 늘 세간의 관심이었다.

무슨 큰일이 생기면 그 뒤에 삼상(森祥)의 의도가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이 종종 돌곤 했었다.


세자에 이어 곧 선왕이 죽은 일과 같은.


하영은 혼수함에 있던 영건(목을 감싸고 어깨를 덮어 앞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흰 수건.)이 생각났다. 대나무 숲 사이의 흑두루미 셋이 있는 자수가 일품인, 안 주인의 위엄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처음 만난 너에게 이런 얘기까지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나는 너를 믿고 싶구나. 영감께서 보내셨다니 더욱 그래도 될 것 같고. 사실 어머님이 답답하여 장 숙원 마마의 신당에 가셨다고 하네. 혼례를 앞두고 몸이 이러니 말일세.”


“...”


“이모님이 공주 자가의 상궁과 친하시네. 공주 자가가 장 숙원 마마의 치성환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은밀하게 전해 들었지. 나도 그걸 먹고 하루 이틀은 괜찮지 뭔가.”


“치성환이요?”


“장 숙원 마마가 기도로 신력을 불어넣은 환약이야. 나도 그걸 꾸준히 먹을 수만 있다면 어쩌면 다 나을 수 있을지도 몰라.”


지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몸에 돌고 있는 줄은 알고 있지만 그걸 다른 사람의 몸이나 물건에 넣는 건 예전 송나라나 명나라가 있던 중원에서 신화처럼 떠돌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마마께서 그러시는데 영감의 사주에 워낙에 금(金)이 많고 음기가 강해 여인과는 인연이 없는 독신 할 팔자라고 하였다고 하는군. 영감께는 말씀드리지 말게. 아버지가 그 얘기를 들으시고는 혼례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서 소박을 맞든 그 집에 가서 죽든 하라고 하셨거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장 숙원 마마에게 상서로운 그림을 받고 싶다고.”


지우는 하영이 측은했다. 사모하는 사내에게 시집가서 다복하게 사는 걸 꿈꿀 수도 없다니. 권세가의 아씨라고 다 부러워할 건 아닌가 보다. 하영의 고운 치맛자락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백단이 그랬다. 사주팔자도 자신이 그 안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제 복을 채우고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이다.


“영감께서는 그런 소리를 믿을 분이 아니십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건강하신 분이 갑자기 무기력해지고 먹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저기 아씨. 영감님을 만나보시겠습니까?”


“혼례 전에 어찌 사내를 만난다는 말이냐?”


하영의 볼에 홍조가 더욱 짙어졌다. 귀까지 붉어지려 해 하영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다독였다. 촉촉하고 탱글하게 두드려지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영감님과 함께 여기로 오겠습니다. 도와주신다면 이 집안을 좀 조사하고 싶습니다. 이 집안에 음식을 하는 어멈이 누구고 식재료를 어디서 받고 있는지. 갑자기 바뀐 사람은 없는지 말입니다. 먹는 거 바르는 거, 냄새를 풍기는 것 모두 조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네 이년! 지금 우리 집안 사람들이 독이라도 써서 날 죽이려 했다는 말이냐!”


하영은 숨이 가빠졌다. 지우를 타박하기보다 정말로 그럴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의심하는 것보다 명쾌해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영감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저는 아씨와 영감님이 사특한 자들의 수에서 벗어나 혼례를 치르시고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너는 효원각에서 일하는 하녀 주제에 어찌 영감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무슨 인연인 게냐? 너도 영감을 마음에 품은 게야?”


지우는 순간 토악질이 나오려는 것은 다시 삼키며 말했다.


“영감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 주제에 어찌 그리 높으신 분을 마음에 품겠습니까?”


하영은 유진에 관해 들었던 소문과는 다르게 좋은 사람이라는 지우의 말이 반가웠다.신부가 될 사람을 쉽게 내친다는 소문들. 이제 살고 싶어졌다. 하영을 살리려고 이 아이를 보냈다는 말에 마음이 다독여졌다. 충성된 종을 둔 유진이 든든했다.


“다시 한번 더 부탁드립니다. 영감님과 함께 아씨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찌 말이냐?”


“마님께 독경사(讀經, 불경을 낭독해 주는 맹인)를 불러 달라고 청하십시오. 마음을 달래고 싶으시다고요. 전에 왔던 강단이란 아이의 아비가 영험한 독경사라는 걸 들었다고 하십시오. 그럼 영감께서 독경사인 체하고 저와 함께 오시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리하마.”


“지금은 몸이 좀 어떠십니까?”


“그러고 보니 숨을 쉬기가 훨 낫구나.”


“...아씨. 큰 효과가 있다고 느끼시는거면. 송구하지만 저의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


“뭐라?”


하영은 진실과 잠시 거리를 두고 싶은 듯 지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 의원들은 아씨의 증상에 초점을 맞추어 약을 지었을 겁니다. 제가 드린 음료는 피를 맑게 하고 중독을 해독하는 것입니다. 중독이 되지 않았다면 내일 아침에 몸이 조금 개운한 정도였을 겁니다.”


지우는 일도 주저함 없이 사실대로 고했다.


“혹시나 하여 매번 은수저로 확인하고 먹었거늘.”


“세상에는 별의별 것들이 다 있습니다. 약이면서도 독인 것들도 많습지요.”


“그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당분간은 아무 맛이 나지 않는 미음만 먹겠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드린 음료를 두고 갈 터이니 병풍 뒤에 감추어 두고 아침 저녁으로 다섯 모금씩 드십시오. 아직 여름이 멀어 서늘한 데 두시면 사나흘은 괜찮을 겁니다.”


“영감께서 내게 이리 신경을 쓰시는 줄은 몰랐다. 널 애써 보내다니 말이야. 여기까지 몰래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영감님께 고맙다고 꼭 전해줘. 너도 애썼다.”


하영은 지우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지우는 여전히 차가운 하영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었다.


“네. 아씨. 꼭 살게 될 겁니다. 떠도는 소문에 겁내지 마시어요. 소문에 힘이 있어 보여도 진실 앞에서는 잠깐 스치는 잔바람에 요란하게 울리는 풍등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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