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람 Jun 06. 2022

내 남편의 취미

택배가 하나둘 도착했다.

아. 이제 시작인 건가.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거대한 사이즈의 어항을 보니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아... 괜히 허락했나.

아니다, 별다른 취미가 없는 사람에게 이게 유일한 樂인데. 그냥 지켜보자.


지방선거가 있던 날.

투표를 하고 온 뒤 수족관 교체 작업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가자미눈을 뜬 나를 의식해서인지 남편 동작은 그 어느 때보다 잽싸고 민첩했으며 이틀에 걸려 완성될 거란 내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루 만에 모든 작업을 끝냈다.


수족관을 관리하는 건 남편의 몫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남편의 취미는 수족관 가꾸기이다.

수족관이 어떻게 우리 집에 입성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 이외의 생명체를 기르는 것에 서툰 나는 처음부터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깔끔한 남편은 수족관 관리를 제법 잘 해냈고 아이도 무척 좋아했다.


중국에서는 집안에 물고기를 키우는 걸 길조로 여긴다. 중국어 사자성어에 '年年有余'라는 표현이 있는데 '해마다 풍요롭길 바란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여분을 나타내는 余가 중국어로 '위(yu)' 발음인데 물고기 鱼도 같은 '위(yu)' 발음이라서 중국인들은 물고기를 키우면 집안에 돈이 넘쳐나고 재물이 불어난다고 믿는다. 물고기를 키우는 게 내심 못마땅했지만 난 애써 그 이유를 대며 남편의 수족관을 인정하고자 했다. 재운을 가져다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일 년 전부터 남편은 더 큰 수족관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물을 갈 때면 거실이 난장인데 더 큰 사이즈의 수족관을 관리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너무나도 뻔했다. 정말이지 34평 아파트의 거실이 협소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수족관 앞에서 경건한 자세로 몇 시간 동안 물을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 주먹이 운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빼도 막도 못 하게 됐다.

더 큰 놈이 집 안 거실을 떡 하니 차지하게 됐고, 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근데 한편으로는 짠하다. 그럴듯한 취미가 없는 남편에게 수족관은 유일한 樂인데 난 그걸 또 매서운 눈으로 째려보며 눈치를 주고 있다. 술을 좋아해 회식을 가고 아이와 극장에 가는 것 말고는 딱히 즐기는 게 없는 남편이다. 남들처럼 골프를 치는 것도 아니요, 낚시를 간다고 몇 날 며칠을 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난 왜 이렇게 야박하게 구는 걸까. 괜스레 미안해졌다. (물론 골프와 낚시를 안 해본 건 아니다. 꽤 많은 장비가 아직도 집안 어딘가에 있으니.)


파란색의 남편은 빨간색의 아내를 만나 매일매일 눈치만 보고 산다. 자기가 좋아하는 수족관을 구매하기 위해 아내를 설득하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오늘 하루만 해도 책잡힐 짓을 하지 않기 위해 허리가 끊어져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연애할 때는 나와 다른 색깔의 그가 참 매력적이고 나와 다른 분야에 능한 그가 참 멋있어 보였는데 어느 순간 그 멋진 남자는 나와는 맞지 않는 답답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본다. 찬찬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정말 수족관이 싫은 걸까? 난장이 되어버린 주말 오후의 거실 풍경이 거슬렸던 걸까?


아니었다. 난 절대 수족관이 싫은 게 아니었다. 수족관을 질투하고 있던 거였다. 나에겐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알뜰히 수족관을 챙기는 모습에 질투하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수족관을 보면 배알이 꼬였던 거다.


아하.

남편이 미운 게 아니었다. 난 그저 결혼 17년 차에도 남편의 사랑이 필요한 주책맞은 여자였던 거다. 주말이면 나와 손을 잡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즐기는 산책이 아닌 수족관 청소를 택하는 남편이 얄미웠던 거다. 그래... 그게 이유였다.


인정하고 나니 씁쓸하다. 고작 수족관 따위게 밀리다니.

나는 매번 남편에게 걸었던 기대가 무너질 때면 그게 남편 탓인 줄 알았다. 내 기대에 부응 못하는 공감 능력이 제로인 사람으로 평가절하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문제였다. 상대의 기분이나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내 기분만 생각했던 이기적인 모습이 원흉이었다.


후.

이렇게 결론 내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수족관이 더는 아니꼽게 보이지 않게 되었고 하트가 뿅뿅 나오는 눈길로 수족관을 바라보는 남편의 뒤통수를 길가의 들꽃 보듯 사랑스럽게 봐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후. 됐다. 이렇게 결론지으니 온 세상이 평화롭다.

나는 자비롭다. 나는 자비롭다.

오늘도 난 주문을 외운다.


婚姻不是(找)一个合适的人,而是要(做)一个合适的人。

결혼은 나와 맞는 사람을 '찾는'게 아니라, 걸맞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모성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