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울병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이에게 활기찬 서울의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계획한 여행이었다.
우리의 주거지는 깨끗하고 조용해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지만 큰 이슈나 볼거리가 많지는 않다. 그래서 활력 넘치고 시끌벅적한 대학가와 번화한 서울, 내가 좋아하는 서울을 아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된 우리 가족의 첫 서울여행.
가끔 서울 나들이를 간 적은 있으나 호텔을 잡고 1박을 한 적은 없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는 거리지만 나에게는 '본격적으로' 날을 잡고 노는 게 필요했다. 아들에게 서울의 대학가와 번화가를 보여주고 싶었기에. 중학교 들어가면 한 번 가보자 마음먹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여태 미뤄왔었다.
코스는 단순하다.
홍대와 신촌을 시작점으로 늦은 오후 대학로로 넘어가 연극을 한 편 본다. 다음 날은 경복궁 방문.그리고 얼마 전 바꾼 수족관에 들어갈 물고기 보러 면목동으로.
우선 차는 비즈니스호텔에 두고 철저하게 대중교통으로만 움직이기로 했다. 맛집은 따로 찾아놓지 않았다. 찾으려 하니 너무 방대한 양에 검색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다.
홍대에서 먹은 점심. 간판만 보고 들어갔지만 꽤 괜찮았다.
역시! 홍대와 신촌은 명실상부 젊음의 거리였다. 홍대를 근처에서는 길거리 래퍼의 공연을, 신촌을 걷다가는 댄스그룹들의 스트릿 공연을 만날 수 있었다. 캬, 역시 청춘의 메카.
댄서팀의 공연은 한참을 서서 구경했다. 각각 다른 매력으로 파워풀하고 신나는 무대가 이어졌다. 90년대 노래인 자자의 '버스 안에서'에 맞춰 춤을 추는 공연에는 내 어깨도 덩달아 둠칫 거리며 흥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진 댄스 배틀도 꽤 흥미진진했다. 아들도 난생처음 보는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공연에 무척 즐거워했다. 다행이었다. 아들에게 이런 패기 넘치고 신나는 길거리 공연을 보여줄 수 있어서.
신촌, 댄스팀들의 길거리 공연
그리고 신촌 주변을 한참 걸었다. 남편은 신촌 주변의 학교에 다녔는데 지형은 그대로이지만 지물이 바뀌어 너무 낯설다고 했다. 본인의 모교에 잠시 들어갔을 때도 신축건물이 많아져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 세월이 얼마인데. 강산이 두세 번은 바뀌고도 남을 시간인데 말이다. 향수에 잠시 젖다가도 변화된 캠퍼스에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홍대와 신촌 일대를 둘러보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대학로로 이동했다.
이번 서울 여행의 일정 중 내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이 바로 연극 공연이었다. 결혼 전까지는 극장보다 대학로를 더 많이 찾았다. 우리 때는 만 원짜리 '사랑 티켓'으로 훌륭한 공연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대학생에게 사랑 티켓은 꽤 수준 있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다니. 이게 얼마 만인지. 아니 대학로에 온 게 얼마 만인지. 아이 낳고는 처음이었고 아이도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꽤 신중하게 작품을 골랐고 고심 끝에 웹툰과 드라마로 제작되었던 '운빨 로맨스'로 예약했다. 감동적인 작품을 고르려다가 아이가 처음으로 접하는 연극이니 재미있고 웃음이 가득한 작품이 더 좋을 거라 판단해서였다.
연극 운빨 로맨스
결과는 대만족. 배우들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와 재미있는 대사 그리고 찰진 욕설에 아들은 빵빵 터졌다. 우리 가족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훌륭한 공연이었다. 이 연극을 선택한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날 연극 말고 날 울컥하게 한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대학로 통기타 아저씨. 연극 시간까지 좀 여유가 있어 대학로를 걷는데 그 아저씨가 계셨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저씨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통기타를 들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능청스러운 입담과 신나는 통기타 연주로 대학로를 찾은 우리를 즐겁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그런 아저씨가 아직도 계시다니. 정말 감격 그 자체였다. 아저씨의 유쾌한만담을 더 보고 싶었지만 연극을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옛 추억에 빠져있던 나에게 아저씨의 등장은 과거 한 기억의 토막이 그대로 재현된 기분이었고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연극 공연을 즐겁게 감상한 우리는 가을쯤 다시 한번 대학로에 오기로 약속했는데 그때도 아저씨를 그곳에서 뵐 수 있기를 바라본다.
대학로의 명물 통기타 아저씨
대학로에서 선택한 저녁은 곱창과 대창이었다. 대창은 처음 먹어 본다는 아들은 그 어마어마한 통통함과 기름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대미를 장식한 볶음밥은 인생 최대의 한 끼였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학로 부추 곱창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서울 타워로 향했으나 케이블 타는 곳까지 1시간의 대기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우리 가족은 두말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우리 셋은 그 무엇보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걸 제일 싫어한다. 제아무리 맛집이래도, 제아무리 풍경이 대단한 전망대라도 대기시간이 30분을 넘어가면 우리는 쉽게 포기를 선언한다. 미련 없이 남산을 내려와 선선한 초여름의 저녁 바람을 만끽하며 우리는 호텔로 향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서울 살 때도 난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기에 지상에서 버스를 타는 게 늘 낯설었다. 하지만 남편은 용케도 노선과 정류장을 잘 찾아냈고 그 덕에 생각보다 헤매지 않고 대중교통을 잘 이용할 수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도보로 다녀서 그런지 마치 홍콩과 대만 여행을 온 것처럼 느껴졌고 그날 하루 3만 보 이상은 걸었던 것 같다. 다음날 물집이 잡힐 정도로 걸었지만 괜찮았다. 셋이서 함께 걷고 함께 얘기하고 함께 즐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오랜만에 탄 서울버스
걷고 또 걸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비가 내렸다. 경복궁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게 번거로울 수도 있겠지만 여행을 즐기는 우리 가족에게 날씨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운치가 있고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나름의 추억을 쌓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