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보이는 노란 찻집, 오늘은 그녈 세 번째 만나는 날, 마음은 그곳을 달려가고 있지만, 가슴이 떨려오네~
- 1990년에 발매된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 가사中.
그녀를 만나기로 한 오늘, 아침부터 괜스레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녀는 내 친구다. 서른이 훌쩍 넘어 만난 친구. 살면서 가장 조심스럽고, 애써 거리를 유지하려 했던 '아이의 같은 반 친구 엄마'로 알게 된 그녀.
매번 그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눈 밑은 시커멓게 번진 아이라이너로 무척 볼썽사납지만,우리의 만남이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웠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나는 소위 '족보 브레이커'다. 2월생이라 일곱 살 때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에 입학한 관계로 대부분의 친구는 나보다 한살이 많다. 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학번을 앞세우면 어느 정도 서열정리가 됐는데, 사회로 나와서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나는 다 친구로 지낼 수 있는데, 나로 인해 관계가 꼬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 친구 엄마를 만나면 나이를 막론하고 전부 다 '어머니'란 호칭으로 통일했다.
"어머, 어머니~ 안녕하세요~"
"네~ 어머니~ 안녕히 가세요~"
동시에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 위에 올리고 인사를 한다. 그럼 나이와 상관없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 말이다.
이 얼마나 현명한 처세술인가!
그런 동네 어머니들 중에 유일하게이름을 부르는 친구가 바로 그녀, S다.
나와는 나이가 같으나 한 학년 아래인 그녀는 이제 내 친구다. 소중한 친구, 서른이 넘어 만났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 중국어로는 闺蜜( guī mì ).
S는 중요한 요소에서 나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연령대며 같은 지역에 살고 있고 유사한 육아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감성'.
서로 놀랄 정도로 비슷한 감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가 S 앞에서는 모든 게 편하다. 가끔은 서로 거울을 보고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니까.
유머러스하며 적당히 지랄 맞은 감성으로 S와 나는 빠르게 친해졌다. 가까이 살고 동갑내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서로의 일상에서 튀어나온 여러 가지 에피소드, 특히 아들들의 다채로운 뻘짓은 늘 우리의 표적이 되었고, 힘들고 괴로운 일도 신나게 웃고 떠들며 견뎌낼 수 있었다.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일상을 공유한다는 건, 어떤 상황에 대해 부연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대화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과거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서로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때면 난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 S는 어느새 내 일상 안에 들어와 있구나, 가족도 어릴 적 친구도 다 알지 못하는 내 상황을 알고 있구나, 이제 내 인생에서 S는 없어서는 안 될 친구구나.
그런 S가 재작년에 이사를 갔다. 뭐 차로 15분이면 갈 거리이지만, 바람이 좋은 초여름 밤, 혹은 오후에 출근하는 S와 아침에 급 만남을 갖는 건 힘들어졌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얼마 전 S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바로 '필사'다.
손재주가 좋은 S는 글씨도 참 예쁘게 잘 쓴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좋은 책을 필사한다고 했다. 두 달 전 그 얘기를 듣고 뭔가 해주고 싶었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하는 친구를 향한 응원이랄까? 며칠 동안 필사할 만한 좋은 책을 고르다, 기가 막힌 선물을 찾아냈다. 바로 S의 이니셜을 각인한 볼펜.
S를 만났다.
내 선물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 친구가 함박웃음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