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나의 숙적, 나의 극단성

극복하지 못한 청소년기의 문제는 성인이 되어 반드시 돌아온다

by 사색



요즘 대학생들은 선생들 위에 서고 싶어 하고, 선생들의 가르침에 논리가 아닌 그릇된 생각들로 도전한다. 그들은 강의에는 출석하지만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들은 무시해도 되는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진다. 사랑이니 미신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들은 그릇된 논리로 자기들 판단에만 의지하려 들며, 자신들이 무지한 영역에 그 잣대를 들이댄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오류의 화신이 된다. 그들은 멍청한 자존심 때문에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창피해한다.


(중략)


그들은 주일에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 대신, 친구들과 마을을 쏘다니거나 집에 틀어박혀 빈둥거리며 기껏 펜을 든다는 게 연애편지나 끄적인다. 만약 성당에 가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으로 가는 게 아니라 여자애들을 꼬시러, 또는 잡담이나 나누려고 간다. 그들은 부모님이나 교단으로부터 받은 학자금을 술집과 파티와 놀이에 흥청망청 써버리며, 그렇게 결국 집에 지식도, 도덕도, 돈도 없이 돌아간다.


-1311년 여름, 알바루스 펠라기우스-



accepted_pool.jpg Accepted (2006)

개인적으로 나는 대학생활을 썩 잘 보낸 편이라 생각한다. 다른 동기들처럼 건실하게 수업을 듣고 학점을 잘 받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대학에 오게 된 계기가 남들과는 조금 남달랐기에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선택하여 마주한 실패가 선택하지 않은 후회보다 낫다'라는 개인적인 가치관이 적극 반영된 나의 대학생활은 즐거움의 측면 하나만큼은 굉장히 성실했다고 볼 수 있다. 내 말의 요점은 대학을 다닐 동안 내 안에 내재된 문제들, 불안과 우울은, 맨날 울고불고 싸우지만 끝끝내 이혼하지는 않는 마누라처럼 참고 살만한 정도였고, 가장 큰 발목을 잡은 인생의 복병이었던 공황장애마저도 2년 동안은 전혀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누구나 좋은 상황에서 본인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착각을 했다.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마음 한 켠으로는 늘 다른 곳을 꿈꾸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미쳐 떨쳐내지 못한 학벌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아니면 제한적이었던 전공의 선택지를 떠나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공부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늘 타 대학으로의 편입이나 재수를 생각했다. 그렇기에 2학년을 마치자마자 편입을 알아봤었고 학원을 등록하였던 것이지만, 이럴 수가 문제는 도저히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집중을 시도할 때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몰려왔고, 무엇보다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공상과 망상 때문에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2년 동안 대학생활을 잘하다가 갑자기 이제 와서 공부가 안된다고?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말이지 내 대학생활은 4년제 테마파크라는 말이 우습지가 않았다.


본적이 기계공학과였음에도 학과가 가지는 취업의 유망함에만 집중했지, 정작 전공과목은 등한시 한 채 철학이나 정치학, 외국어 교양 따위나 열심히 들었고, 정말 내가 이 길을 걷는다면 맨날 충실해야 할 수학이나 물리 따위는 재미도 관심도 없었다. 그러면 왜 전공으로 인문계열을 선택하지 않았냐라고 생각이 들 것인데, 그 당시의 나는 취업에 대한 미래의 불안감이 있었고 어느 학문이든 선대 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라잡기 위해 필요한 일말의 난해함과 어려움마저도 기꺼이 피했던 것 같다. 즉, 나는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성실하지 못해 성공하지 못한 전공생활은 여러모로 실패한 결혼생활과도 비슷했다. 매일 일어나면서 이 사람과 함께할 시간에 한숨이 나왔고, 금요일이 되면 이번주도 버텼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다시금 일요일이 도착하면 마주할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결국 휴학을 한 나는 채 시도한 공부가 빛을 보기도 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올해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것보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지긋지긋한 나로 돌아가는 것이 몇 배는 더 무서운 일이었으니깐. 더 이상 스스로가 통제하지 못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벌레처럼 갉아먹히는 삶은 지긋지긋했다. 그래, 물론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생각이 우리의 지적활동에서 생겨난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의 구동과정에서 발생한 정크파일 말이다. 쓰레기들이 제때 처리되지 못하면 그것이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는 것처럼 해결되지 못한 생각들은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영향을 준다. 나에게는 수험생활이 그 극단이었고 대학생활에서도 종종 그러했다.


내 정신세계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것, 의미 없는 집착과 후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편안한 환경에서 푹 먹고 푹 쉬고 푹 자는 것으로 부족했다.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안에서 우러나오는 내재된 문제이기 때문에. 나 또한 단순히 휴학을 하고 푹 쉰다면 곧 괜찮아지겠거니 했지만 몇 년 만에 나의 집, 온전한 나만의 공간으로 돌아온 상황에서 나의 불안과 우울의 징조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내 마음속 상처를 틀어막을 수 있었던 한 줌의 좋은 사람들과 환경이 모조리 내 곁을 떠났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나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과정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차례의 감정기복과 공황상태, 과다한 망상과 백일몽을 경험하며 나는 내가 양극성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강한 의심과 불안을 겪었다. 그렇게 큰 결심을 하고 찾아간 정신과에서 나는 불안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렇다 정신병이 재발을 한 것이다.


브린텔릭스와 레피졸 등 새로운 약들을 처방받으며 급한 응급처치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약효가 돌았는지 아니면 심리적 안정인지 중증의 불안은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전히 약을 복용하지 않은 순간에는 끊임없이 몰려들 불안감과 우울감에 대해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나의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은 그 자체로 불안요소였으니깐. 그러한 연유로 한동안 스스로의 비이성적인 공포와 염려에 시간에 대한 물리학책을 깊이 빠져들기도 하였다. 결국 나는 문제의 원인이 나의 신경계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방식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생리가 아닌 생각에 해결책이 있음에 분명했다. 의사 선생님과 몇 개월 동안 반복적인 처방과 상담, 예후 관찰을 지속한 결과, 줄곧 이어져온 나의 사고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극단성임에 분명했다. 내 사고의 핵심 명제인 극단성이 나의 우울과 불안을 부추기는 원흉임이 분명했다.


의학 용어 중에는 사이토카인 폭풍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사이오닉 스톰도 아니고, 짐짓 게임용어 같아 보이는 이름이지만, 사실은 우리 신체의 최후의 수단인 급성 면역 이상 반응을 가리켜 사용하는 용어이다. 우리의 면역 체계는 백혈구나 세포독성 T세포, 보조 T세포 등의 면역 세포들을 통해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에 대응한다. 하지만 만약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가 너무 강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저히 우리의 면역체계가 이겨낼 거란 장담이 없다면 말이다. 우리의 신체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이토카인 폭풍 상태에 진입한다. 우리의 신체에 면역 반응 수행을 위한 지시를 내리는 면역물질인 사이토카인이 과다분비되면, 우리 신체는 말 그대로 폭풍에 휩싸인 것 같이 난도질당하기 시작한다. 면역 세포들은 정상 세포와 이상 세포를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진행하고, 우리 몸에서는 모든 적들의 사멸을 향해 40도 이상의 고온을 유지한다. 결과적으로 신체 내의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사멸하지만 정상세포와 장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환자 또한 높은 확률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러한 예시를 꺼내든 이유는 간단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처를 헤집는 행위는 동시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또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정신적 문제인 우울과 불안, 더 나아가 장기적인 삶의 침체를 야기하는 원인인 극단적인 사고방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려든 나는 마치 사이토카인 폭풍에 빠져든 환자와 같았다. 좋은 사람들과 공동체 안에서 유지되던 나의 도덕과 규율은 홀로 남겨지며 완전히 힘을 잃었고, 교육과 독서를 통해 배양된 나의 이성은 스스로의 연약함이 완전히 드러난 상황에서 감정을 통제할 힘을 잃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연약했고 방황했으며 사춘기 소년과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의 비이성적인 공포와 분노는 때로는 원망의 형태로 가족들과 연락 없는 지인들 심지어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과 사회를 향해 분출되었고 결국 이 모든 일들은 내 가족과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있어서 큰 상처와 실망을 안겨주었다. 나는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 자신의 문제와 직면했지만 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피폐하고 상처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1000001366.jpg A Clockwork Orange (1971)


우리가 수술을 통해 부패한 장기를 떼어내듯이 마음속 괴로움과 외로움을 도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수많은 난동과 방황에도 불구하고 22여 년간 이어져온 나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는 나의 삶을 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술은 시작되어 버렸건만 나는 그 무엇도 잘라내지도, 떼어내지도 못한 상태로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의 군생활이 시작되었다. 반복되는 삶과 조직에서의 규율은 나를 신선한 자극과 괴로움으로 잠시나마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삶의 난제는 남아있었고 열려버린 상처 사이로 현실의 괴로움과 이물질들이 공상의 세계로 혼탁하게 섞여 들어오는 상황, 나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금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아야 했다.


이전까지 내 삶을 사자성어로 요약하자면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삶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예민하였던 나는 요동치는 내면을 품고 살았고, 나의 불안정성 속에서 어른들은 영특함의 소재를 발견하였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남들과는 조금 더 일찍 홀로 서는 경쟁사회 속으로 내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만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조금 이르게 사회에 진출하고 가족과 멀어졌을 뿐이지 내 또래라면 아니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경험한 이라면 누구나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이른 나이부터 가혹한 경쟁에 내몰려 비교당하고 평가절당하며 품평당한 경험이 있을 거니깐.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는 경쟁 자체가 경쟁력이 되어버린 지금의 현실이 경쟁으로써 모든 것을 효율화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인지, 우리 사회가 성숙이 아닌 성장에만 급급해 넘어가버린 모순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쟁이 성적 따위보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보다는 분명히 중요한, 스스로의 내면을 성숙한 어른과 함께 되돌아볼 기회를 놓치게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공통된 것이라고 본다. 왜 주위의 수많은 사회초년생들이 중증의 정신적 문제를 호소하는지, 왜 제대로 영글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하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서 비명과 신음을 내지르는지,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작은 실패 앞에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는지, 결국 이 문제의 답은 왜 대한민국이 불행한지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렇게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던 나는, 결국 타인이 주입하고 스스로가 뿌리내린 성공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실패한 정신병자로 사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학창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질 어른이 되어서도 악몽이 한번 뿌리내린 극단적인 사고방식은 계속해서 나의 발목을 붙잡으며 나를 죽음의 가능성을 몰아넣고 있었다. 우울증의 가장 최악인 점은 인생의 사소한 고비들이 찾아올 때마다 최악의 결말로 치달을 가능성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말의 이름은 바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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