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성은 그 자체로 삶의 리스크 관리 실패이다.
장기적으로 뛰어난 투자 성적을 얻으려면, 단기적으로 나쁜 성적을 견뎌내야 한다.
-찰리 멍거
첫 번째 원칙은 절대로 잃지 마라, 두 번째 원칙은 첫 번째를 절대로 따라라
- 워런 버핏
투자의 성공 여부는 얼마의 기간 동안 세상의 비관론을 무시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피터 린치
우리는 기나긴 인생을 살아간다. 매 순간 우리는 경미한 불행과 사고, 실패를 마주한다. 그리고 마주하는 그 순간들은 하나같이 큰 고통이다. 우리는 범접할 수 없는 추락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이 상황이 영원할 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언젠가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은 잠깐의 하락일 뿐이다. 나는 줄곧 인생이 주식과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 유가증권시장에서 주가가 영향을 받는 요인과 우리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분명 다르다. 그렇기에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다소 적절하지 않은 시도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인생을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긍정적인 관점을 소개할 뿐이니, 여러분의 명징한 이성은 잠시 내려놓고 편한 마음으로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오늘 갓 상장된 회사의 주식을 들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이 회사의 주가가 미래에 어떻게 변동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 유망한 회사의 잠재적 가치를 믿고 주식을 구매하게 되었다. 갓 상장된 회사에는 초반에 많은 거래대금이 몰려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회사가 주식상장을 통해 자본금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더 큰 수익성을 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 주가는 변동하고 시장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물과 같이 요동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원히 상승만 하는 주식은 없다. 회사의 펀더멘탈(기본가치)이 지속적으로 늘어난다 할지라도, 명백히 회사의 가치보다 주가가 고평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경우, 기술 격차가 발생해 실적악화로 이어진 경우, 경제 대공황과 팬데믹 같은 빅이슈들에 의해서 수많은 조정이 발생하고 무수히 많은 악재가 우리의 주가를 하락시킨다.
이와 같은 주가하락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큰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주식을 매도한다. 하지만 몇몇 이들의 경우 오히려 하락의 상황에서 추가로 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더 저렴하게 매수하여 평단가를 낮추기 위해 물타기를 하는 경우, 더 낮은 타점에서 진입하기 위해 팔고 다시 매수하는 경우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주가가 일시적으로 하락하더라도 이 악재가 영원하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 회사의 가치와 수익을 발생시키는 능력은 여전하다는 믿음이 존재하기에 정말 중대한 결격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언젠가는 해당 주식이 다시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이러한 행동을 한다.
우리의 인생도 갓 상장된 주식과 같다. 출생 이후 사회는 아이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보살핌을 아끼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생물학적인 연대와 애정을 벗어나 이 같은 지원과 보살핌이 국가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지속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 아이들의 성장, 미래세대의 양육이 우리 사회의 존속과 발전에 직결된다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는 방향은 곧 어른들의 믿음이 투사된 결과이다. 우리 사회가 지속적으로 아이들에게 고학력과 고소득의 가치를 투사하는 이유는 고소득자와 고학력자들의 배출이 곧 사회의 고가치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실재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곧 미래다.'라는 표현은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닌 그 자체로 냉정한 진실이다. 우리가 지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미래와 맞닿아있기에 아이들의 불행한 현실은 곧 우리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한다.
사소하고 중대한 문제들을 거쳐 주가가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듯 우리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에 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 남들과 같은 꾸준한 우상향 대신 큰 하락을 겪는 경우도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 가정의 불화, 빈민계층으로의 경제적 몰락, 불운한 학창생활 등이 그 하락들이다. 하지만 청소년기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우상향 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다수의 부모가 그리고 우리의 사회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기대는 변함없는 건강과 좋은 성적이 대부분이니깐. 좋은 성적을 받고 건강한 것만으로 그들의 인생은 잘 풀리는 것처럼 보인다. 설령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작은 실패나 불행에 부딪히더라도 우리에 대한 기대와 지원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것은 작은 돌부리에 불과하고, 결국에는 우리가 딛고 일어설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실패에 실망하는 부모는 아무래도 현명한 투자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인생은 다소 복잡해진다. 학생이라는 신분과 대학이라는 목표가 분명한 어린 시절에 비해 많은 부분들이 빈칸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고 그 빈칸을 채워 넣는 일은 학창 시절 문제의 정답을 적어내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며 살아야 하는가', '어떠한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것인가'가 그 일부이다. 이 문제를 풀어내는 데 있어서 이전까지 배워온 것들과 주변의 조언마저도 무의미하다. 오직 자신만이 이 문제의 답을 알고 적어낼 수 있다.
인생이라는 종목의 하락 또한 훨씬 큰 변동성으로 찾아온다. 부모의 병환과 죽음, 경제적 불황, 평생을 함께할 것 같았던 연인과의 이별, 취직의 어려움, 직장에서의 해고, 성인의 뒤늦은 방황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짤막한 예시이다. 빈약한 상상력으로 담아낼 수 없는 불행한 경우의 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삶의 질이 하락하는 시련들 속에서 큰 괴로움을 느낀다.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어쩔 때는 본인의 역량으로는 지금의 현실을 견뎌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주가가 완전히 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지금 주가가 아무리 상승을 하더라도 이전까지의 하락을 복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갈 쓸모와 용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내면에 극단성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은 주식으로 치면 레버리지 종목과 같은 이들이다. 위의 그래프를 보면 레버리지 상품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레버리지는 위험성을 대가로 더 큰 수익을 노리는 상품이다. NVDL이라는 종목은 NVDA의 주가가 올라갈 때마다 2배로 상승하는 대신 주가가 내려갈 때에도 2배로 내려간다. NVDA의 가격이 100원에서 105원으로 +5% 상승할 때마다 2배 레버리지 상품은 100원에서 110원으로 +10% 상승한다. 하지만 만약 본주의 가격이 105원에서 100원으로 -4.8% 하락해 본래의 가격으로 되돌아오더라도 2배 레버리지 상품은 110원에서 87.1원 -9.5%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레버리지 상품의 경우 분명한 주가의 상승과 하락이 보이는 시장에서만 추천되지 횡보와 하락이 반복하는 상황에서는 장기투자할 것을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익절과 손절이 분명한 주식과는 다르게 인생에는 중간에 매도와 매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극단성을 지닌 이들은 삶의 긍정적인 신호에 민감하기에 한번 방향을 찾으면 남들의 배는 되는 열정과 속도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하지만 그만큼 이들은 성공에 민감하기에 실패에 있어서도 크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경미한 불행이라도 삶의 크나큰 손실로 다가오고, 한번 크게 실패하면 쉽게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또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상향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의 삶이 쉽게 불행 앞에 흔들리는 만큼 인생이 분명 나아질 수 있는 기회와 인연의 가능성 또한 분명히 존재하니깐. 하지만 하지만 주식에서 오랜 기간 횡보와 하락을 거듭하는 주가를 인내하는 것이 투자자에게 별도의 심적 비용이 되는 것처럼, 인생의 침체기를 인내의 마음으로 버티는 것 또한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단편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은 선형적이며 우리는 끝까지 완주하거나 주저앉아버리는 수밖에 없다. 항상 그 비율이 균등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삶의 고배 또한 감로와 같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극단성의 본질은 위험성에 있다. 극단성은 많은 위험한 것들이 그러하듯 우리를 매료시킨다. 극단성은 우리가 목표에 빠르게 도달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그마한 실수 하나에도 우리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극단성 그 자체인 사람들은 결국 최대 속도로 상승하거나 최대 속도로 하강할 뿐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살면서 단 하나의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만을 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당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왔으며 또 얼마나 많은 낙담과 실의의 순간들이 우리의 가장 끔찍한 악몽의 형태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겠는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엄격하면 엄격할수록, 바람직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의 삶은 실패 앞에 한없이 취약해진다. 그렇기에 엘리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실패로 인해 범인만큼도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평균에 대한 높은 기준치가 역설적으로 사회 전반에 팽배한 긴장과 압박으로 인해 그들의 회복탄력성을 크게 낮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극단성은 그 자체로 삶의 리스크 관리의 실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