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건 내려놓음이었을까 자포자기였을까
무지이위용(無之以爲用)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에 꽂혀있어도,
빈 공간이 있어야 수레바퀴로써 쓰임이 있는 것 같이
찰흙으로 그릇을 빚어도,
빈 공간이 있어야 그릇으로써 쓰임이 있는 것 같이
문과 창의 구멍을 뚫어서 방을 만들어도,
빈 공간이 있어야 방으로써의 쓰임이 있는 것 같이
있음의 이로움은 비움의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 도덕경
이제 극단성에 대한 반대개념으로서 '내려놓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예전의 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든 적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불교나 도교에서 말하는 마음비움이라는 개념이 이와 유사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무지이위용(無之以爲用) '없음이 쓰임새를 만든다', 노자의 이 한마디가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이 말에 깊이 감화되었고 과연 내가 2년이라는 유예시간 동안 무엇을 비우고 채워야 할지 절실히 고민하였다. 나는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의 정욕과 게으름, 스스로에 대한 인색함, 스스로의 좋고 나쁨에 극렬하게 반응하는 연약함을 비워내야 한다고 다짐했었고, 그 비어있는 공간에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애정과 부드러움, 확고한 신념, 치열하고 부딪히고 성취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고 고백했었다. 그래야만 내가 나로 살 수 있다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비장한 다짐과 함께.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보건대 과연 나는 휴학을 통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가? 정말로 지금의 나는 애정과 부드러움, 확고한 신념과 성취함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인가?라고 반문한다면 맹세컨대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감정은 인간에게 강한 힘에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원이지만 동시에 휘발성이 강한 연료이다. 우리가 전날 울면서 다짐했던 내용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가 힘든 상황에서 느낀 감정이 우리에게 강한 변화의 다짐을 불러일으킬지라도, 그것이 사고에서 그친다면 실제로 변화하기는 쉽지 않다. 추운 날 눈밭 위에 새겨두었던 글씨들이 다음날 아침 따뜻한 햇빛에 녹아내려 없어지듯이 말이다. 나의 다짐도 그러하였다.
우리가 힘든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결핍이 끝났을 때에도 당신이 여전히 같은 것을 간절히 염원하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처럼 들릴 것이다. 우리가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원하지만, 경제적 자유를 얻고 나면 그때의 절박한 마음과 고통은 교훈과 성장의 시간이었다고 미화되기 마련이니깐.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전히 우리 내면의 근본적인 문제는 잠재되어 있으며, 환경에 따라 그것이 잠깐 나아진 것처럼 보일 뿐 우리의 내면은 변화한 게 없을 때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내면의 문제적 자아는 선한 사람들과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적대할 대상이 사라졌기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 우리의 내면 속 불안정한 자아는 당신이 홀로 남겨지는 가장 취약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다. 세상 많은 좋은 것들에 대한 갈망은 의식하지 않아도 찾아온다. 그렇기에 그만큼 노력하지 않고 찾아오는 평온함에 쉽게 잊히기도 한다. 우리가 좋은 환경과 안식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 더욱더 스스로의 내면에 대해서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온한 마음이 갖추어졌을 때 우리는 내면의 문제를 온건하게 다루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대다수의 재능은 평범하지만 게으름만큼은 비범한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이고, 지금의 내가 여전히 강하게 경계하는 나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내가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전과 같은 실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극단성이라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불교나 도교의 '마음비움'이라는 개념은 분명 듣기 좋았지만 건실함과 침착함과는 거리가 먼 제가 명상이나 수양을 통해 '마음비움'을 이뤄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번에 선택한 내려놓음이란 어떻게 보면 조금은 과격한 해결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부정적인 사고를 멈출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호흡을 멈추듯이 대뇌의 활동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리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인간은 빨간 코끼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언가를 부정하려는 태도는 그 자체로 우리를 무언가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안에 가둬놓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식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다른 대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해 의식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요리나 게임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이전에 뚜렷하게 얘기를 꺼낸 적은 없지만 나는 요리하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양식이면 양식, 일식이면 일식,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언가를 조리하는 과정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내 안의 창조성을 충족시키는 행위이다. 내가 칼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재료의 익힘을 얼마나 하는지에 따라, 어느 순서로 간을 하냐에 따라 그 모든 손길이 결과물에 영향을 준다. 무엇보다도 내 입에 들어가는 것, 섭취되고 소화되어 나를 구성하는 그 일부를 통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각별한 정서적인 만족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설령 그 결과물이 평이할지라도 정서적인 만족감은 비싼 파인다이닝을 가는 것에 뒤처지지 않는다. 행여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지인이 있다면 나중을 기대해도 좋다.
그다음으로 내가 집중한 것은 게임이었다. 그래 안다. 정신적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게임이라니. 지금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소리이긴 하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무언가 몰입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힘든 순간을 견뎌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시청각적으로 상호작용이 가능한 복합예술의 측면에서 게임을 굉장히 고평가 한다. 예로부터 자녀의 저조한 성적을 자식의 부족함이나 가정교육의 실패로 받아들이는 대신 게임이라는 문화의 유해성에서 찾으려고 한 과거의 어른들과는 다르게,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게임을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가장 탄력적으로 소비되는 문화콘텐츠 중 하나이다. 아이들에게 학습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건전한 취미생활의 중요성을 간과한 대다수의 어른들 덕분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세상 그 어느 나라보다 쉽고 빠르게 전자오락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어렸을 적부터 몸소 터득하였다. 나 또한 사교육 시장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람으로서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게임을 남들보다 얼마나 더 탁월하고 빠르게 목표에 다가가는지에 대한 경쟁적인 측면보다, 게임이라는 장치가 탁월한 연출 장치로써 보여주는 예술적인 면모와 정교하게 짜인 시스템 내에서 사용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보여주는 창조성에 열광한 것 같다. 나는 때로는 서부시대의 한복판에 위치하며, 때로는 깊은 심해를 탐험하는 마음으로 가상세계에 몸을 던지며 잠시나마 현실의 괴로움에 벗어났다.
그렇게 스스로가 생각한 '내려놓음'의 기준에 따라 살아보니, 나는 내 안에 내포된 스스로에 대한 적대적인 자아들, 발전이 아닌 채찍질 그 자체가 목적인 터무니없는 기준들,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무고한 이들에게 전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피해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줄 알았다. 드디어 내 안에 있는 극단성과 양면성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드디어 해답을 찾았구나', '비로소 내 인생도 남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눈물지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의 이 태평한 마음가짐, 잔잔한 하루의 안식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옅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편안하기에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지금 이 상황이 뭔가 불편하고 공허하다는 양가감정이 번갈아 소용돌이쳤다.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정신적 평안을 얻었건만, 내가 그토록 부정하고 두려워했던 불안이 없어졌건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냉기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장장 2개월을 정체 모를 공허함과 게으름으로 낭비하던 나에게 도전의 시간이 찾아왔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응시를 결정한 시험이었고, 만족스러운 성적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막상 그 도전의 상황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처참히 그리고 어처구니 없이 낙방하니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한 건 내려놓음도 뭣도 아니었다고. 만약 누군가가 들고 온 방법이 어제는 작동했지만 오늘은 유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해결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그 상황에만 유효했던 임사방편이었을 뿐이다. 내가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건 내려놓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빌어먹을 자포자기였다.
나는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주제에 그것을 절실히 노력해 얻어낼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스스로의 의지박약과 작심삼일로 그것을 포기한 주제에 '내려놓음'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었다. 더 나은 나의 모습과 건강을 포기했기에 몇 안 되는 정신적 자구책이었던 운동을 그만두고 매일 음주로 내 몸을 망쳤고, 더 좋은 환경과 꿈이었던 미국 유학을 포기했기에 공부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남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했기에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의 삶에 대해 어리석은 말들을 내뱉었고, 더 이상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기에 스스로를 다듬고 세계와 소통하던 유일한 수단이자 장기인 독서와 글쓰기마저 내다 버렸다. 결국 내 삶에 더 이상 기대하는 게 그리고 기댈 것이 없으니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마저 없어졌다. 그 어떠한 노력도 성취도 이륙한 적 없는 20대 청년이 선택한 '자칭' 내려놓음의 결과는 빠르게 삶의 무가치함으로 변질되었다. 그렇게 나는 완벽한 잉여인간이 되었다.
내가 간과하였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모든 것에 있어서, 심지어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가장 큰 한계와 발전은 우리가 동일한 자극에 대해 동일한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하루하루 잘 출근해 잘 먹고 잘 쉬면 그만이었던 삶은, 그저 고통스럽게 출근하고 지쳐 퇴근하며 무료하게 내일을 기다리는 삶으로 변모했고, 자극 없는 격리된 삶, 자칭 내려놓음의 태도는 나를 창살 없는 감옥, 탈출구 없는 미로에 가두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쇼펜하우어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 다시 한번 옳았음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과 권태 사이를 무한히 오가는 시계추에 불과하기에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 자는 필연적으로 끔찍한 권태를 마주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나의 삶은 겨울철 농수로와 같이 쩍쩍 말라붙었다. '내려놓음'의 결과로 나의 삶에 유의미한 목적과 의미가 사라져 버리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말초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손쉬운 쾌락이 그러하듯이 그 길의 끝은 깊은 허무함만이 남아있었다. 과장 없이 나는 이 과정에서 왜 삶의 목표를 잃은 젊은 청년들이 왜 마약에 빠지게 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의 삶의 이유가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단 하나에 수렴한다고 본다. 그것은 오직 재미이다. 그것이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우리가 변함없이 갈구하고 변함없이 우리가 인생에 웃음 짓게 하는 요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기 이전에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은 항상 큰 재미의 순간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하루하루 불확실한 즐거움의 가능성에 기대어 살아갈 뿐이다. 매 순간이 재미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터무니없이 지루하다는 말과 동일할 것이다.
왜 젊은 청년들이 마약에 빠져드는 지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내가 직접 체험하거나 그러한 지인을 둔 적이 없기에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대부분은 적절한 삶의 자극이 부족하기에 가벼운 호기심이나 경각심의 부족, 불운한 사고 또는 불순한 의도를 거쳐 마약을 접할 것이라 생각된다. 마약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이 정상적인 수단으로는 얻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쾌락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 어떠한 노력이나 성취의 고단함 없이도 단순히 마약을 복용함으로써 세상에 다시없을 전능감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데 그 누가 귀찮게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력하는 삶을 살아갈까. 아무리 노력의 힘을 긍정하고 불가능한 성공을 쟁취해 본 사람이더라도 한번 마약을 접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며 손쉽게 성취할 수 있는데도 불필요한 과정을 거친다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즐거움의 관점에서는 '나태한' 짓일 것이다. 그러니 내 주변의 누구라도 내가 마약을 시도하거나 시도할 것 같다면 납치와 감금과 폭행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를 단호하게 파멸의 길에서 떼어내 주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기에 가장 손쉬운 것은 아마도 마약이 가져다주는 무제한의 쾌락일 것이다. 쾌와 불은 모두 뇌의 한 곳에서 관장하기에 쾌락에 대한 무한한 추구는 결국 쾌락 그 자체가 아닌 그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변질된다. 어쩌면 지극한 쾌락과 고통이 본질적으로 양 극단에서 맞닿아 있기에 역사 속 수많은 권세가들과 부호들이 저속하고도 비인륜적인 쾌락에 빠져 본인과 본인의 주변 사람들을 크나큰 불행에 빠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양세계로부터 비롯한 나의 과학적 세계관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구상의 여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신경세포가 주축이 되는 단백질 덩어리의 탄소기반 생명체에 불과하며 세상에는 신도 마법도 영혼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를 무관하게 우리 모두의 깊숙한 내면에는 가능한 많은 쾌락을 담하고자 하는 마약중독자의 면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은 고통만큼이나 개인의 이지와 삶의 가치를 붕괴시킨다.
나는 생물학자도, 심리학자도, 뇌신경과학자도 아니다. 나는 단지 인간에 대해 관심이 많고 과학과 기술이 우리 삶 속 많은 부분들에 합리성을 더해줄 것이라 믿는 순진한 이공계생에 가깝다. 그렇기에 내가 그럴듯한 지식을 갖고 와 여러분들에게 설파하는 것은 이 글을 볼 수도 있는 전문가들에게 얕은 지식을 커터칼 마냥 휘두르는 치기 어린 어리석음으로 보일 것이며 더욱 성숙하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나의 논리는 사정없이 논파되고 까발려질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는 글쓰기는 나라는 사람이 살기 위한 질박한 움직임이자 처절한 생의 자기 고백이다. 이것은 단순히 내 개인적인 삶의 경험들만을 들고 와 여러분들 앞에서 하는 고백이다. 나의 삶은, 나의 세상은 이러하다고.
지금 돌이켜보건대 나의 내려놓음 아니 자포자기적 사고는 나라는 사람의 회피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종착역이었다. 마주하지 않으니 고통받을 일도 없고, 바라지 않으니 나아질 이유도 없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나는 많은 것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건만 결국 도망친 곳에 안식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 모든 포기와 연속적인 실패들 속에서 나는 다시 이곳으로 복귀했다. 줄글의 세계로, 문장과 문단의 세계로 말이다. 결국 내 모든 글쓰기의 목적은 나만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연약한 나의 마음을 세상의 온갖 위해와 불합리로부터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의 존재이다. 나를 지켜보는 여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글은 쓰일 힘과 보일 의미를 잃어버린다. 나의 미성숙하고 충동적인 감정이 글의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라는 관찰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반응을 부탁한다. 그 신선한 자극이 나에게 글을 집필할 새로운 힘이 되어준다.
사실 지금까지 나의 글쓰기의 원료는 명명백백히 고통이었다. 나한테는 글쓰기 자체가 내 안에 쌓인 감정의 연료를 불태우고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글이 줄곧 자기 합리화와 자기 성찰의 중간적 성격을 띤 이유도 그것이었으며 나의 글이 한동안 끊겼던 이유이기도 한다. 나의 글쓰기의 원천이었던 생각의 소란이, 정신병에 가까울 정도의 다발적 사고가 상실한 현시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지칠 줄 모르고 쌓아놓았던 겨울철의 땔감이 모두 떨어진 기분이고, 사실 이 글의 초안까지만 하더라도 알코올과 수면부족의 긴장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쓰인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것은 사고가 아니다. 나에게 찾아온 불운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이것이 나의 글쓰기가, 나의 세계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본다. 절망에서 비롯된 글쓰기가 아니라 희망을 내다보기 위한 글쓰기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분별하게 공개된 인터넷 세계에 함부로 나의 의견을 함부로 펼치거나 내 개인적인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히 두려움으로 가득한 일이다. 개성은 사치라는 사회 속에서 평생을 주변과 동조하라고 압박받으며 지내왔는데 어째 사람이 모나지 않겠는가. 서로를 가리켜 네가 더 모나고 네가 더 못난다는 지금의 사회가 미친 세상인 것 같다. 당연히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도,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이러다가는 모두가 닳아 없어질 것이다. 제발 사람들이 똘래랑스(Tole' rance)와 유머(Humor)를 갖추었으면 한다. 진심으로.
그래도 다행인 점을 손꼽아보자면 요즘 내가 인류애를 많이 되찾은 듯싶다. 나의 최초이면서도 궁극적인 동기 말이다. 예전에는 사회와 사람들을 보면서 지긋지긋한 마음이 들어 눈에도 담기 싫었는데 이제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수용하고 싶다는 여유로운 생각이 든다. 나라는 개인의 관점에서 보나,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나 긍정적인 일일 것이다. 모쪼록 이 글을 봐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 앞으로는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글이 아닌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남에게, 그리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 물론 그렇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나 믿는 것처럼 모든 비이성적인 분노와 두려움은 미지에서 비롯되며, 지식과 이성은 우리에게 남을 수용하고 세상을 이해할 용기를 심어줄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 세상이 따뜻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들 너무 가혹한 하루를 보내지 않기를, 내일에 대한 두려움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기를 바란다.
다들 좋은 하루, 좋은 저녁, 좋은 밤 되기를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