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제1장 · "삶의 무상함을 기억하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영원한 것이 없다.
내적인 지혜로 잘 관찰하면,
모든 고뇌와 고통을 멀리 떨쳐낼 수 있다.
오직 청정한 해탈을 얻는 길이다.
<해탈로 가는 길 이야기>277
나는 학생들에게 화내지 않으려 한다. 다만 혼을 낼 뿐이다. 무슨 차이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엄연히 둘은 다르다. 화낸다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고, 혼낸다는 것은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나무라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있었던 일로 설명하자면, 복도에서 무릎 슬라이딩을 하는 학생이 있다. 여기서 혼낸다는 것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묻고, 그것이 잘못된 이유는 무엇인지 알려준 뒤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일러주는 것이다.(물론 언성을 높이지 않고) 반면에 화낸다는 것은 '뭐하는 짓이냐', '무슨 생각이냐' 등의 말을 일그러진 표정과 격정적인 어조로 말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혼내는 것은 '지도'에, 화내는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 있다.
혼내는 일에 감정을 섞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나 쉼없이 지도해야 하는 경우에 그렇다. 우리 학급에는 정말 많은 관심을 요하는 학생이 한 명 있다. 특징을 몇 가지 적자면 ①매우 공격적, ②가만히 있는 것이 불가능, ③피해의식, ④자기중심적 등등 담임을 맡아본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만나봤을 그런 학생. 소위 말하는 금쪽이라고 하면 이해가 쉽다. 새학기가 되고, 혼내기가 화내기가 되어버린 첫 번째 사건은 지난주 수요일이었다. 2교시 쉬는시간에 남학생 둘이 교실 한 귀퉁이에서 자석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 학생은 두 남학생에게 다가가 '내놔'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학생이 저리 가달라고 하자 그 학생은 가달라고 한 학생의 목을 때렸다. 나는 바로 지도했다. 이어서 3교시가 되고, 그 학생은 내게 혼난 것이 언짢았는지 본격적으로 수업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신음소리 내기, 샤프로 책상 내려치기, 내가 던지는 질문에 큰 소리로 엉뚱한 답 말하기, 누군가 '선생님 저 다했어요'하는 말에 '어쩌라고 돼지년아'라고 말하기 등의 행동이었다. 생활인권규정에 맞추어 바로바로 지도했다. 그리고 3교시 쉬는 시간이 되자 이번에는 자석을 집어던져 부쉈다. 또 다시 복도로 데리고 나가 지도했다. 지도를 마치자 4교시가 되었다. 4교시에도 본격적인 수업 방해 행동이 시작되어 경고를 받았고, 경고를 받은 뒤 잠잠하게 있다가 수업을 마칠 때 쯤, 교실을 순회하며 하는 활동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학생에게 '뭘 봐 돼지년아'라고 했다. 즉시 밖으로 불러 지도했다.
"왜 '뭘 봐 돼지년아'라고 한거야?"
"그냥 쟤가 기분나쁘게 꼬라보잖아요."
돌아오는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소리를 질러버렸다.
한바탕 시끄러운 지도가 끝나고 교실로 돌려보냈다. 교실에 돌아가서 지금 너의 감정때문에 죄 없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다시 너를 부를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그랬더니 쉬는 시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가, 수업시간이 되어 돌아왔다. 불편한 감정으로 5교시를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내내 속이 불편해져서 식사도 조금만 했다. 밥을 먹고 학생들 하교 인솔을 하기 전까지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하교할 시간이 되자 그 학생이 웃으며 교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들끓던 내 마음은 불바다가 되었다.
나는 그날 밤까지도 기분이 나빴다. 그렇게 혼났는데도 뭐가 즐거울까? 내가 화낸 것은 안중에도 없는 건가? 선생님으로서 나의 지도는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인가? 앞으로 아홉달을 더 함께 지내야하는데, 그 학생이 내 지도를 듣지 않고 오늘같은 모습만 보인다면 우리 학급은 화목할 수 있을까? 또 다시 작년처럼 하루하루 괴로워하며 출근해야 하는 걸까?
이 세상을 물거품과 같이 여겨라. 또 이 세상을 아지랑이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세상을 관해야 한다.
《법구경》<세속이야기(世俗品)>170
담임을 맡고 2주가 지난 뒤, 나의 1년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데 내가 가진 비교군이 적다보니(이번이 세 번째 담임), 정말 힘들었던 작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라니. '나의 교직생활은 괴로움에 가득 차 있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 역시도 금세 지나갈 일일뿐이었다. 아침에 잠깐 머물렀다 사라지는 이슬처럼, 한순간 번쩍하는 번갯불처럼 말이다. 3월 새학기가 시작되고 매일이 힘들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평일에도 물론 좋은 날이 있었고, 주말에도 즐거운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괴로웠던 단 며칠만으로 다가오지도 않을 미래까지 어두울 것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법구경 속 말처럼 물거품과 아지랑이같은 것이다. 물거품은 곧 사라지며, 멀리서는 내 시선을 어지럽히던 아지랑이는 바로 앞에 다가가면 실체도 없다. 멀리 바라보면 지금의 순간이야 아주 찰나일 뿐. 어찌보면 나보다 그 학생이 위에 인용한 법구경 속 말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듯 하기도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끊임없는 욕심과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고통을 없애려고 한다면 갈애와 집착으로 인해 고가 발생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법구경 마음공부》
어느정도는 내려놓자. 그 학생의 행동들로 인해 내가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은 나의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꿔야겠다는 욕심, 교실에서는 교사의 모든 지도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집착이었던 것이다. 물론, 교실 안의 다른 학생들을 위해 교사로서 해야할 도리는 반드시 해야한다. 다만 내가 그 학생을 바꿀 수는 없다. 여기에 들어맞다 여겨지는 것이 인연과(因緣果) 현상이다. 그 학생이 타고난 기질(因), 자라온 환경과 어울려온 주위 사람들(緣)이 만들어낸 것이 지금의 모습(果)이다. 내가 그에게 연(緣) 한 줄을 보태줄 수는 있지만, 그의 본질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바꾸려 집착하지 말자. 다만 피해주는 행동에 대해서는 감정을 빼고 지도하자. 또한 나도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상황에서 곧이 곧대로 하지 않았음을 떠올리자. 학교에서, 군대에서, 또 다시 학교에서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면서 내 학생들은 무조건 내 지도를 따라야한다는 집착을 왜 가지고 있었을까? 제 눈에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이 떠오른다.
또 다시 점심시간에 남학생들 간 다툼이 있었다. 몸을 부대끼며 놀다가 툭툭 치더니 다툼이 진지해졌나보다. 식사하러 가기 전, 학생들에게 손씻으러 가도록 말한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 학생이 연루되어있지는 않았다. 내가 화장실에서 학생들 지도하고 있던 차에 일어난 일이라 다툰 학생들을 학년 연구실로 따로 불러 이야기 했다. 쉬이 잘못을 인정하는 학생이 없어 차근차근 대화해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 때, 우리반 교실 뒷문에서 문이 떨어지는 듯한 '쾅'소리가 났다. 연구실에 있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곧 돌아올테니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라 말한 뒤 교실로 갔다. 교실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묻자 모두가 그 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학생은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발로 찼는데요."
순간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왜 이리 뻔뻔스러울까? 다시 화를 낼 뻔 했다. 다만 이번에는 화내지 않았다. 이 또한 물거품처럼 사라질 순간이니까. 언성을 높이지 않았으나 필요한 지도는 모두 고집스럽게 했다. 큰 소리가 나지 않음에도 교실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 학생에게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줬으니 사과하도록 했다.
그 학생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점심시간에 나가서 놀다가, 하교 직전에 웃으며 교실로 들어왔다. 나 또한 학생들을 하교시킴과 동시에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 글을 쓰면서 내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이 하나 생겼다. 쓰다보니 그 순간들이 너무 생생해져서 조금 언짢아졌다. 아직 한참 멀었구나. 오늘도 고집멸도를 마음에 새기며 잠에 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