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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으로 Mar 25. 2022

3월 25일의 꽃, 덩굴성 식물

'아름다움'이라는 꽃말

 여러분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덩굴성 식물은 무엇인가요? 아마도 '담쟁이', '아이비', '칡' 등 이겠지요? 오늘의 꽃은 이렇게 덩굴을 이루며 벽이나 다른 식물 등에 덩굴을 감아 기생하는 모든 덩굴성 식물입니다. 남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 덩굴성 식물의 꽃말에 갑자기 '아름다움'?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드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저 또한 그랬거든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너무도 상대성이 강한 개념입니다. 절대적 아름다움이라는 게 있을까요? 무엇이든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분명 그것만의 열정과 애씀이 있습니다. 외관적인 예쁨과는 별개로요. 저는 그 노력과 의지를 아름다움으로 칭하고 싶네요. 오직 하늘을 향해 자라며 자신의 힘을 다하는 담쟁이가 돌담에 붙어 기생하여 살아간들 그 생명력과 고요한 분투가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집중해야 할 것은 '고요한 분투', 즉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예쁜 사람보다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철없고 멋모르던 어린 시절에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성스럽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예뻐지는 것보다 아름다워지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예쁨은 직관적이고 아름다움은 직관적으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향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 더욱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이제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 씀씀이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인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어요. 사람의 인상과 풍기는 분위기, 향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향해 살며 그리로부터 어떤 내음의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흔히 말하는 좋은 인상과 아름다운 분위기를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뻐지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하는데 서투른 사람입니다. 다만 꾸준히 제 문제에 직면하고, 개선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 자신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제가 잠시 잘난 체를 해보자면 저는 비교적 아주 조금은 아름다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친구와 있었던 일화를 들려드릴게요.

 친구와 만나 브런치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만남에 있어 조심해야 할 못된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친구와 이야기하다 보니 저는 참으로 안일하고 사회생활을 10년 이상 한 것 치고는 바보같이 순진하더군요. 살면서 못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는 거예요. 진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못됐다고 생각을 못한 것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권력자에 붙어 온갖 사탕발림을 하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권력인양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며,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들을 빠짐없이 험담하고 정작 험담한 당사자를 만났을 땐 누구보다 반갑게 인사하는 그런 사람, 직장에서든 사회에서든 한 번씩은 만나본 적 있으시죠? 저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저에 대한 헛소문과 비방을 퍼뜨리고 다닌 것을 직접 제 귀로 돌아 들은 적도 있지요. 그런 사람이 바로 못돼 먹은 사람이라는 겁니다.(사실 친구와는 더 격한 표현을 썼습니다. 못돼ㅊ......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몰랐습니다. 그 사람이 못된 사람인 줄. 당시 그런 일을 겪었을 때 물론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 '무엇을 채우고 싶었을까?', '뭐가 그렇게 불안했을까?' 하고요.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그 사람에게 어떤 정서적 결핍이 있을 것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하게 되는 못된 행동들은 멈추는 순간 자신이 지켜오던 마음의 방패막이 하염없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행동들 때문에 스스로가 갉아먹혀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이 힘들고 외로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 사람을 보니 무작정 밉지만은 않았습니다. 안타깝고 불쌍했습니다. 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본인도 지금과는 다른, 염원하던 빛깔의 삶이 따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미움과 증오는 사라지고 연민과 안쓰러움이 자리했습니다. 더 잘해줘야지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따듯한 눈빛으로 이해해봐야지라고 생각하며 그를 대했습니다. 때때로 이렇게 살아오며 오히려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한 대죄를 짓기도 하였지만 그냥 저는 그렇습니다. 세상에 못된 사람은 있지만, 못되어진 것이 꼭 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고 무엇인가 그를 외롭고 불안하게 살게끔 만든 원인이 있을 거라고요. 그러다 보면 세상에 미워할만한 사람은 그다지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네요.

 많은 부분이 부족하지만 이러한 박애주의(?) 덕분에 저는 특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아름다운 아이템을 획득한 것 같습니다. 타인에게 전해지는 따듯함과 신뢰입니다. 모든 사람이 저에게 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소중한 인연들은 제게 늘 따듯함과 신뢰의 분위기, 아름다움을 느껴주시곤 합니다.

 구태여 아름다워지려고 기진맥진 애를 쓸 필요는 없지만 아름다운 사람으로 늙고 싶다면 사실 관련된 아이템들을 모으는 재미가 쏠쏠한 게임과 같은 것이 아름다운 인생을 향한 여정입니다.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내가 만드는만큼 풍성하고 아름다워지니까요. 어때요, 참 쉽죠? 하하.

 덩굴성 식물들이 득템 한 아름다움은 아마도 '최선의 삶을 위한 고요한 분투'가 아닐까 생각하며 오늘의 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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