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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으로 Apr 05. 2022

4월 5일의 꽃, 무화과

'풍부'라는 꽃말

 꽃이라고 적고 무화라고 쓰니 아이러니하시지요?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고 멈춘 사람은 없다는 제 피셜, 중독성 갑인 과일 무화과가 오늘의 꽃이랍니다. 꽃이 없는데 꽃이라 하고 꽃말을 쓰라니 의아하실 수 있는데요. 사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은 아닙니다. 꽃받침과 꽃자루가 주머니처럼 길쭉하게 생기고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작은 꽃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하네요. 우리가 열매라고 생각하는 그 무화과가 사실은 무화과의 꽃입니다. 아주 동그랗고 묵직하며 어찌 보면 토속적이기도 한 귀여운 꽃입니다.

 '풍부'라는 꽃말 외에도 '풍요', '다산'의 꽃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풍요롭고 풍부하게 다산하는 미덕(?)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산이 미덕이 된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다자녀 가구에게는 주택, 직장, 지원금 등 많은 혜택이 주어집니다. 서른일곱의 미혼 여성인 저는 날로 증가하는 저출산 문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반항아입니다. 비혼이냐구요? 딩크족이냐구요? 뭐,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어요. 삶이 다 그렇잖아요. 어쩌다 보니 지금 여기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것. 때가 되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것이고, 때가 되지 않으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겠죠. 혹은 결혼은 하지만 아이는 낳지 않을 수도 있고, 아이는 낳지만 결혼은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때는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면, 그리고 저의 부족한 점을 보면 때론 아이에게 삶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어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표현을 쓰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과연 아이가 얼마나 행복하게 자랄  있을까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자율성을 지킨  단단하게 성장할  있을까? 과연 우리 한국사회가 아이들의 정서적 풍요를 보장할  있는 사회인가? 유치원 때부터 사교육의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낼  있을까? 하는 온갖 걱정들로 가득했습니다. 사회 탓만  것도 아닙니다. 부모탓도 했습니다.  조차도 미성숙한 인간인데 부모가 되어 혹여라도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면 어쩌나, 무심코 던진 말이 아이의 꿈을 짓밟으면 어쩌나, 컨트롤하지 못한 저의 감정으로 인해 위축되고 불안한 아이로 자라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아이를 낳지 말자. 짐을 짊어지게  바엔 아예 낳지 않는  낫다고 맘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뭔지 모를 막연한 책임감도 덜어지고  나이에 대한 걱정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런 말을 들은 상담 선생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고. 그리고 완벽해서도 안된다고. 그래서 그랬죠.


"그렇지만 부모의 치명적 결점 때문에 아이가 받을 상처는요? 피해는 누가 보상하나요?"


선생님이 말씀하십니다.


"피해가 아니라 배움입니다. 부모의 부족함으로 인해 아이는 그것을 극복하고 조율하는 연습을 합니다. 그때 쌓아 올린 내공을 사회에 나와 사용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물론 학대 및 방임의 수준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 하에 각자의 부모들이 가진 미성숙함이 오히려 그 자녀들의 성숙함을 단련하는 계기가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완벽에 가까운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 중 왕왕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럴 것도 같습니다. 갈등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해결하는 방법도 서툴겠지요. 이 순간 저는 약간 으쓱합니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편이거든요. 하하. 타고난 기질이 예민해 가족들에게 받지 않아도 될 상처까지 혼자 받으며 응어리진 채 살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런 일정의 무심함이 저를 사교의 왕 슈퍼우먼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가족들 고마워요.

 그래서 생각해보면 부모와 자식, 자매와 남매, 형제 즉 가족들은 퍼즐 같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비워진 부분은 내가 딱지를 만들고 딱지가 떨어지면 새살을 돋웁니다. 그래서 퍼즐의 비워진 부분을 채우는 것이지요. 비로소 함께일 때 완벽에 가까워지는 것, 그게 가족,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닐까요. 이제껏 왜 이 부분이 비었냐고 원망만 했는데 이제는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엄마, 아빠도 최선을 다했지만 비워진 부분이라고. 그 때문에 내가 더 단단해지고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그동안 제 원망을 듣느라 고생한 엄마 아빠께 진심으로 미안해지는 저녁입니다. 아빠, 엄마 미안해요.

 유럽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낳는다."라고 하지 않고 "부모와 아이가 만난다."라는 표현을 쓴다고 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너무나 맘에 듭니다. 아이가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서로 기쁘게 만나는 느낌이 들거든요. 각자의 인격체는 퍼즐 조각처럼 더 가진 부분도 있고 덜 가진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도 부족할 수 있고 아이에게 배울 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 맞춰나가는 거죠. 어때요? 부모로서의 책임감도 덜어지고, 아이의 삶 자체도 오롯이 설 수 있는 아주 멋진 명언 아닌가요? 부모로서 다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누구나 부모가 처음인 순간이 있으니까요. 다만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고 부족한 퍼즐 조각의 부분을 알아채 주려는 노력이 있다면 아이는 스스로 요렇게 죠렇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저 말고 풍부하고 풍요롭게 다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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