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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으로 Jan 15. 2022

완벽한 인간

 완벽하게 살고 싶었다. 종종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서른 중반까지는 나름 젊음의 에너지로 완벽함에 다가가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을 몸과 마음이 버텼다. 그런데 2년 전, 딱 서른 중반이 되었을 때 그만 와르르 무너졌다. 번아웃이 오고 그간의 내 인생은 실패이며 앞으로의 미래도 암담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들어졌다.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 버티고 버티다 짓눌려질 것 같았다. 출구가 없기에 숨쉬기 어려웠고 그저 한 방울의 거품이 되어 비행하다가 폭 하고 터져 나라는 존재가 사라졌으면 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상담을 받으면서 알게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 신념이었다. 완벽하게 100점을 맞지 않으면 그 과정도 99점의 결과도 다 소용없다는 완벽주의 신념이다. 처음 무엇을 배울 때 10년동안 그 일을 한 전문가와 비교하여 나를 자책한다. 공통 주제를 여럿이 배울 때 나보다 잘하는 사람과 비교하여 나는 왜 항상 잘하지 못할까 비관한다. 사람들은 내가 잘해왔고 잘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들의 이야기에 괴리감을 느끼고 그들의 이야기를 불신하곤 했다. 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지 하며. 그렇게 나는 나를 속 빈 강정, 빛 좋은 개살구 취급을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점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고 결국엔 100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또 다시 자기비하와 자책의 굴레를 반복했다. 마음이 곪고 아프지 않은게 이상했을 일이다. 그런데 얼마전 상담을 받던 와중에 완벽한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 볼 시간이 있었다. 진정으로 완벽이라는 지점이 있을까. 있다면 그 완벽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뜻할까. 상담 선생님께서는 완벽한 인간이란 없다고 말씀하셨다. 모든게 다 좋아보여도 남모를 속사정이 분명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 속사정이 적은 사람이 있고 많은 사람은 있을 수 있다. 쉬이 동의가 되지 않았다. 한 예로 우리나라 최고 기업 s전자 회장의 딸이 떠올랐다. 언젠가 SNS로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하고 싶은 예술을 하고, 태어나면서부터 경제적인 부분을 걱정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예쁘고 소탈해보이는 성격까지 모든게 완벽해보였다. 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삶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그 속사정이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보다 몇 배, 몇 십배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비합리적 신념을 고치는데 실패했을까? 아니다. 완벽한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차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신이 있다면 조물주가 인간을 탄생시켰을 때 어떠한 인간상을 온전하다 여기며 빚으셨을까. 단 하나의 실수도 없고 완벽이 있다면 그 완벽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책하고 자학하게 만드셨을까. 그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자 하는 존재인데, 그렇다면 온전한 인간상에 대해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무엇이 더욱 인간다운가. 무엇이 더 온전한 인간상에 가까운가. 가끔은 실수도 하고 처음하는 것은 버벅대기도 하며 10년된 전문가 보다 무엇인가를 처음 접하는 내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모습 아닐까. 실수해서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쓴소리를 들은 것을 나의 능력부족으로 귀인하여 나를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은 누구나 서툴고 점차적으로 나아지면 된다. 그 과정에서 나를 완벽하지 못하다고 자학하거나 질타하기보다는 조금 더 너그럽게 지켜봐주는 그런 여유를 갖는 것. 그것이 곧 나에대한 사랑이고 온전한 인간상에 가까운 모습 아닐까. 여기서 '온전한'을 '완벽한'으로 치환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인간상이란 처음엔 서툴고 때때로 실수도 하며 점차 나아가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게 당연한 것, 그것이 진짜 완벽한 인간 아닐까. 내가 그동안 좇던 비합리적 신념의 완벽한 인간은 결코 옳지 않다. 나를 갉아먹고 결국엔 어쩌면 나를 하찮은 벌레 취급 해버리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나는 올바른 신념을 가지려고 한다.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진 나는 그 완벽의 기준을 100점 만점에 60점에 두련다. 존재하지 않는 100점을 좇아 나를 미워하고 자학하며 사느니 60점만큼만 해도 잘해다고 나를 다독이며 그렇게 행복에 다가가는 인생을 살겠다. 조물주,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모습도 바로 이런게 아닐까. 결코 자신을 못살게굴며 사는 누군가의 삶을 신과 인간 그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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