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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으로 Jan 05. 2022

눈 왔으니 쓸어야지!

  밤새 눈이 내려 길 위는 흰 빛이다. 살뜰하게도 쌓인 눈을 치우려 새벽부터 여지 없이 들려오는 비 소리, 비 질 소리는 때론 단잠을 깨우는 소음 같기도 하고 박자를 맞추어 행진하는 행진곡 같기도 하고 쌓인 눈 뿐만 아니라 마음 속 먼지를 쓸어내는 경쾌한 역동음 같기도 하다. 좁디 좁은 건물 사이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골목길 저만치부터 슥삭이며 닦인 눈 아래로 원래의 도로 색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뽀얀 눈과 같은 색도 아닌 오묘한 색깔의 여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민트색 모자를 쓴 아주머니는 그렇게 완연히 동이 트기 전부터 무심히, 힘을 들여 눈을 쓸기 시작한다. 그 자욱이 마치 생선가시처럼 이리 갔다 저리갔다 뾰족한 양 끝을 만들며 앞으로 전진한다. 얼마가 지났을까. 생선가시 여정은 어설프게 매달린 전선들을 지나고 건물의 입구를 지나고 이제는 큰 도로변까지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마치 아주머니가 도화지 위에 4B 연필로 그려 놓은 스케치 같다. 거실 창가에 매달려 창문을 열고 보고 있자니 그 풍경이 차릿한 공기와 만나 뿌옇게 사라지는 입김과 혼재되어 아스라하고 어렴풋하게 다가온다. 인생은 실수와 함께 가는 여행이라던 혹자의 말이 마음에 남아서 이리저리 비틀댄 것 같은 비 질의 흔적은 부딪혔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넘어졌다 일어서서 조금씩 전진해온 누군가, 혹은 나의 삶 같더이다. 길게 늘어선 그 삶의 여정이 지리하게 느껴지다가도 대견하며, 건물 입구를 뚫고 나와 여전히 계속되는 그 행보는  내 지난날에 대한 감사와 남은 삶의 원동력 같은 감상을 남긴다. 건물 입구를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겨버린 그림의 끝에 가만히 내 시선을, 그리고 상상으로는 내 발 끝을 조심스레 놓아본다. 회백색의 여정 가운데 슬며시 가려진 노란색 차선이 보인다. 평범하던 인생에 다가온 즐거운 이벤트였을까, 아픔이었을까. 통상 도로에서 노란선은 경고 혹은 강력한 경계이니 쉽사리 넘으면 안되거나 넘기 힘들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앞뒤로 지나가는 차들 사이에 그저 발이 묶여버린 무단횡단자의 덫 같은 것이었을지도.

  아마 지난해가 그랬고 지지난해가 그랬으리라. 노란선에 단단히 발이 묶여 아파하고 눈물을 흘렸으리라.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며 주저 앉아 울고 있었을 나 그리고 당신은 마침 그 노란선을 지나 큰 도로변까지 무심하게 눈을 쓸던 민트색 모자 아주머니 덕분에 다시금 이어갈 수 있는 인생의 그림을 상상해본다. 그래. 많이도 힘들었지. 때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종이 앞 뒷면처럼 너무 하찮아 울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 이렇게 일렁이고 멀미하며 그래도 이제껏 켜켜히 살아왔구나. 버티고 감내하며 살아온 삶이 이렇게나 길구나. 고생 많았다. 덫과 같던 노란선을 지나 그 이후로도 조금 더 그려진 비 질의 끝, 회백색의 도로위에 서 본다. 응, 이제 더 그려가야할 인생의 시작점에 있구나. 여전히 흔들릴테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가치롭게 그려질 그 그림의 또 다른 시작점에 서 있구나. 이제 내가 빛깔을 내고 스케치하며 인생이라는 작품을 이어나가는 것이구나. 내가 힘을 낼 차례구나.

  아침에 부스스하게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삶의 용기를 다지는 이 거사가 2022년 1월 2일 평범한 일요일에 일어날 줄은 몰랐다. 사실 아주머니는 으레 눈을 쓸었을 뿐이고, 그간 비탄에 빠졌던 나는 어쭙잖은 감성을 더해 무려 삶을 살아나갈 의지를 다진 것이다. 아주머니는 상상이나 했을까. 창문 너머로 몰래 아주머니의 비 질을 바라보던 한 여자가 다시금 살아보겠다고, 아직 다 그려지지 않은 도화지 위에서 빗자루 아니 붓을 들고 인생을 재차 그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을. 우스운 이야기다. 그렇지만 해보자. 살아가보자.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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