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짝은 지금 한국에 있다

'못 가는 것'에서 '안 가는 것'으로의 전환

by 열린

"당신의 선택들이 두려움이 아닌 희망에서 오는 것이기를."

(May your choices reflect your hopes, not your fears.)

-넬슨 만델라



“너도 오지 그랬니. 엄마가 비행기값 어련히 줬을 텐데.”


짝의 한국행 출장을 하루 앞둔 날, 영상통화에서 엄마는 내가 짝과 함께 한국에 같이 오지 않아 아쉽다고 성화였다. 그렇잖아도 한국에 갈까 했다. 한 달 전, 이번 학기 가르칠 예정이었던 수업이 정원 미달로 폐강되자마자, 나는 올해까지 쓰지 않으면 소멸되는 아시아나 항공 가족 마일리지로 갈 수 있는 한국행 비행기 몇 편을 알아보았다. 9월 첫째 주 즈음, 짝보다 먼저 한국에 갔다가 짝이 출장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계획으로 마일리지 항공권을 검색했다. 9월 8일, 내가 사는 리치먼드에서 인천까지 20시간 걸리는 항공권이 있었다. 환호하며 항공권을 결제하려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추가로 내야 하는 유류할증료와 세금이 한화로 80만 원이었다. 그제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마일리지 항공권으로 인천에 올 때, 편도인데도 1인 당 20만 원 넘게 추가 요금을 냈던 게 기억났다. 내 필요로 마일리지 항공권을 구입할 때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추가 요금 가격이(일단 보통 비행기 티켓 값보다 훨씬 싸니까) 2개월 만에 한국으로 가는 상황에서는 부담이었다. 우리 가족은 외벌이에 가깝고,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내게 큰 금액이었다. 무엇보다 3개월 만에 귀국해 미국 생활에 적응 중인데, 이 과정을 또 겪을 걸 생각하니 쉬이 결제란을 클릭할 수 없었다.


한번 한국에 다녀오면 물리적 과도기(transition)를 겪는다. 하루 종일 피곤하고 졸린 시차 적응은 당연하고, 제2언어 입출력은 느려져 있다. 뉴욕 사는 친척언니는 한국에 갔다 오면 미드를 몰아 보며 언어 작동 메커니즘에 기름칠을 한다. 통과의례처럼 겪는 심적 과도기는 혹독하다. 엄마를 보고 왔는데 몇 계절은 못 본 것처럼 더 보고 싶다. 엄마와 한국에서 시간을 같이 보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걸까. 미국에 있다는 것만으로 한없이 미안해져 우울한 기분에 며칠을 잠겨 있다. 이민살이 선배들 말로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무뎌진다 하는데, 그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더욱이, 9월에 한국에 간다면, 지난달 미뤘던 프락시스(Praxis, 미국 공립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시험) 시험을 또 미뤄야 한다. 지난여름 한국에서 공부해 와 귀국 후 바로 시험을 치를 수 있게 시험 날짜를 신청했었다. 한국에서 시험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이다. 시험날짜에 준비된 것이 없어 시험 날짜를 미뤘다. 한국에 다시 가면, 프락시스 시험 날짜를 한번 더 변경해야 한다. 날짜 변경으로 40불을 추가 지출하는 것도 아까운데 시험이 미뤄질수록 버지니아 주 교사자격증 전환 프로세스는 점점 더 오래 걸리게 된다.


“색시 데리고 와야지!”라는 엄마 말 때문에 더 그랬을까. 짝은 혼자 한국에 가는 것을 미안해했다. 프락시스 시험을 마치고, 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나만 한국 가서 미안해”란 말을 꺼내며 양 눈썹을 미간 가까이로 모았다.

“자기야, 내가 이번에 한국을 가지 않았던 건 내 선택이야. 한국에 다녀오면 시차다 뭐다 분명 여기 일상에 적응하는 데 또 몇 주가 걸릴 거고.. 난 여기서 내가 하기로 했던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


나의 한국행이 ‘못 가는 것’에서 ‘안 가는 것’으로 바뀌자 짝의 한국행 발걸음도 그를 배웅하는 내 마음도 더 가벼워졌다.


한국에 가지 않는 대신 짝의 캐리어 한 칸에 UV차단에 좋다는 야외모자 두 개, 내가 즐겨 쓰는 트레이더 조스 통겨자 소스 한 병, 엄마가 좋아하는 미국 코코넛 과자, 무릎 통증에 효과 있는 진통젤 다섯 통을 넣었다. 세시간 반 운전해 짝이 머무는 출장지로 오는 부모님이 같은 호텔에 머물 수 있게 예약도 했다. '집에 와서 자면 되니 호텔을 취소하라'는 엄마에게 취소불가한 상품이라며 거짓말도 했다. 이제 다음 주면 짝의 비워진 캐리어 한 칸과 한 개 더 가져올 수 있는 무료 캐리어 하나에 엄마의 사랑이 꽉꽉 채워져 올 것이다. 두 분이 농사 지어 직접 수확하고 담근 고춧가루, 깨, 매실액, 깻잎 장아찌와 내가 사는 곳에서 구하기 힘든 김치 담그는 데 필요한 큰 소쿠리와 스뎅그릇이 담긴 사랑이.


이번 주 수요일, 목포에서 부모님과 짝이 2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짝이 내 프락시스 합격 소식을 알리자, 두 분이 크게 기뻐했다 한다. 나는 엄마를 멀리 떠났다. 보고 싶거나 필요할 때 쉬이 만날 수 없는 선택을 기어이 했다. 어떤 선택에는 여진이 남는다. 선택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방법은 스스로와 삶을 신뢰하며 일상을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 외에는 없다. 내 앞에 무엇이 펼쳐지든 이를 환대하며 씨를 뿌리고 기다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홀로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의 특권에 감사하며 고독의 시간에 기꺼이 머문다. 머무름의 축복을 맘껏 누리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아간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