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사적 이야기 보호하기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
- Maria -Culm 사원 제단에 세워진 글(괴테의 일기에서)
정현종이 <방문객> 시에서 노래하길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라 했다. 그의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함께 오기에 부서지기 쉬운,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기 때문에.
교사로 일할 때 아이 한 사람의 생이 내게 온다는 무게감이 컸다. 특히, 새학기 초 학부모 상담 때 학부모가 아이가 자라오며 겪은 아픔, 가정의 어려움, 부모 본인의 시련을 한참 어린 내게, 초면과 다름 없는 만남에 털어 놓을 때면 내가 뭐라고, 이런 이야기를 덜컥 꺼내 놓는 지 송구했다. 나의 인격을 신뢰하기 보다 담임교사라는 나의 직때문에 부모는 내게 스스럼없이 취약성을 드러냈다. 자신의 아이를 더 잘 이해하고 너그러이 돌봐달라는 마음 하나로.
얼마 전 영주권을 신청하는 한인 이민자의 비자 과정을 통역으로 도왔다. 비자 신청자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통역할 사람을 급히 찾았고, 나는 선뜻 나섰다. 비자인터뷰 때 통역하려면 비자 신청 서류에 통역자 서명이 필요하다 해 변호사를 같이 만났다. 음성과 영상통화를 한 차례씩 하고 처음 그녀와 그녀의 남편과 얼굴을 마주했다. 변호사 사무소로 향하는 길과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는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굵직한 인생사를 단 두시간만에 들었다.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않을 아픔까지도.
그 아픔에는 도움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의 삶을 뒤에서 왈가왈부하는 한인사회 가십문화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는 헤어질 때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저는 말씀 드렸다시피 전문 통역사는 아니에요. 그래도 통역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압니다. 오늘 제게 해 주신 이야기, 앞으로 제게 해 주실 말씀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게요. 저의 양심에 기대 약속드리는 게 아니고요, 통역자가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로요.”
통역자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한 사람의 목소리에는 그의 숨결이 담겨있다. 바로 한 사람의 살아온 삶이, 역사가 묻어 있다. 이민 사회에서 통역을 필요로 할 때는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잘 들어야 할 때이다. 자신과 삶, 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통역을 구한다. 그 과정에서 철저한 제 삼자인 통역자에게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낱낱이 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나는 통역자가 되어, 한 사람의, 가정의, 공동체의 역사를 들었다. 나에게는 인지적이든 감정적이든 과분한 일이다.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내가 이 숭고한 무게를 감당하는 길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지켜주는 것 밖에 없다. 침묵으로.
교사와 통역자 뿐 아니라 의사, 변호사, 상담사 같은 많은 직업인들 역시 섬기고 돌보는 대상의 사적 이야기를 보호한다. 공적 관계가 아닌 사적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굳이 상대가 비밀이라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한 이야기는 상대만 할 수 있도록, 상대의 허락 없이 전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그 권한을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