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달동네 우리 집 이야기

가난한 집에서 공부의 꿈을 키우다!

by 노이 장승진

나는 가끔 어렸을 때의 내가 태어났던 집을 기억하고 깊은 상념에 빠진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유난히 기억이 잘 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희한하게 과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선명해지고 최근 기억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제 인지력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걱정도 된다. 혹시 "경도성 치매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나는 서울 흑석동의 빈민가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당시 서울의 대부분이 빈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못시장'이라고 불리웠던 우리 동네에는 우리 집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인 걸인들도 자주 통행하였다. 1960년대 상반기에 태어난 나의 기억으로 서울의 우리 동네에서 걸인인 '거지'들은 주로 학생이 입었던 낡은 검정 교복을 많이 입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집에도 문 앞에서 밥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경우도 많았다. 천성이 순하고 착했던 어머니는 밥과 반찬을 주곤 했지만 한 번은 우리 집도 먹을 것이 없었는지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그러자 걸인이었던 한 소년 걸인이 집에 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밥을 주지 않는 다고 오해하여 큰 소리로 욕을 하며 '씨발! 나도 나중에 우리 집에 밥 달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 줄 거야!'라고 소리치던 모습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우리 집은 겨울에 매우 추웠다. 현관이나 거실이 없었던 우리 집은 방문을 열면 바로 외부였던 집이었고 당연히 벽도 얇은 난방이 되지 않은 집이었다. 우리 집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외풍'이 심했다. 지금 같은 겨울에는 너무 추웠고 물을 끓여서 세수를 하였다. 가족들이 저녁을 먹으면 초저녁부터 따뜻한 불을 때는 방에 누워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온돌을 위하여 아궁이에 연탄 같은 것을 사용한 것 같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구들장을 이용하여 난방을 하였기 때문에 가족 중의 누군가 하나는 화상을 입기도 했다. 엄마도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고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심하게 구박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연탄보일러를 설치해서 비로소 요즘과 비슷한 온돌방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방이 1개밖에 없었고 한방에서 온 가족이 잠을 자야 했다.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동네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공중화장실에는 야한 성적인 낙서가 많았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사춘기에 들어선 나는 그러한 글귀를 호기심을 갖고 읽었다. 초등학교 졸업때 최우수 성적 졸업 학 교장상을 받은 적이 있는 바로 위의 형, 그리고 나는 반에서 성적이 우수한 편이어서 친구들이 가장 생활이 어려운 동네인 '연못시장'에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화장실에 갔다가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화장실에 들린 것으로 가장했다.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동네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중화장실이 철거되었다. 나는 화장실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고 가까운 산에 가서 누고 올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남들은 끼니를 걱정했는데 어린 나는 일매일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배가 아플까봐 걱정했다. 화장실이 당장 필요했던 아버지는 우리집과 붙어있는 2 주택을 갖고 있는 바로 옆집인 약간은 그 동네에서 잘 살았던, 사실은 약간은 거만해 보이시고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옆집아저씨에게 부탁과 사정을 해서 그 이웃집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남의 집 화장실을 이용하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너무나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우리 집을 개조해서 작지만 화장실을 만들었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한 번은 우리 동네를 내가 짝사랑했던 교회여동생이 지나가다 우연히 나와 마주쳤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가장 이쁜 여학생이었는데, 우연히 우리 집 근처를 지나가다가 나를 알아보고는 "오빠네 집이 이 근처야?" 하고 물어보자 나는 "아니"하고 급하게 말하고 그다음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건 뒤에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무기력해 보였다.


당시부터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심한 대로 성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양천구에서 돈을 많이 벌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서울 대규모 목동아파트 단지에서 검판사, 의사, 사장들이 사는 구에서 내가 가장 돈을 많이 벌기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목표를 바꾸었다. 우리 구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직장 종착역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 현재 법학박사와 사회복지학 박사를 취득하고, 심리학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사회복지사 1급, 청소년상담사 1급 등을 비롯한 수많은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색 자격증으로는 간호조무사자격증, 산업인력공단에서 네일아트 자격증, 피부미용자격증, 헤어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정말 엉뚱한 일이라고 모두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봉사할 때에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세월은 많이 흘러 한 생각은 사람은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회해도 소용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도전한 공부는 언어치료사의 길이다. 어린시절 장실이 없었던

집에서 꾸었던 꿈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 시절 그 집에서 결정한 나의 꿈은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것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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