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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May 24. 2022

아기의 집 (가제)

과거_학교의 기억 (1)

지휘봉을 들고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잠자코 교실을 돌던 선생님이 어느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선생님의 지휘봉이 가리킨 것은 H였다. 지휘봉 끝으로 H의 머리 밑을 함부로 헤쳤다. H의 머리카락은 선천적으로 밝은 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간혹 햇빛을 받으면 어린 아이의 머리가 할머니처럼 벌써 하얗게 세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뒤로 얌전하게 묶여 있던 H의 머리 모양이 한순간에 헝클어졌다. 머리 밑에 때 낀 것 좀 봐라. 머리 언제 감았어? 


H는 유순하기는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저 머리 자주 감는데요, H는 초등학교 3학년이 그 같은 상황에서 낼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는 침을 꿀떡 삼켰다. 나 같으면 아무 말도 못했을 텐데. 그러나 선생님은 H의 항변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감기는 뭘 감아, 이렇게 이가 많은데. ‘이’라는 소리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으악! 소리치며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얼른 감고 와. 소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겨울은 아니어도 아직 아이들이 긴 팔 옷을 입고 있었다. 화장실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H는 머뭇거렸고 아이들은 H에게 집중된 채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지휘봉을 H의 책상 위에 세우고, 두 팔을 얹은 채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내리 깔고 침묵 하고 있던 H는 마지못해 주춤주춤 일어났다. 소녀는 H를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소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녀의 눈은 H를 향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복도를 걷는 H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아이들이 전부 복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로 복도를 걷는 H를, H의 창백한 뺨을,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그 아이의 눈을. 선생님은 한동안 아이들의 소란을 진정시키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잠시 뒤 돌아온 H의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H의 젖은 머리가 얼굴 위로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선생님이 교탁 위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수건 하나를 던져 주었다. H의 자리는 창 바로 옆의 구석진 책상이었다. H옆으로 햇살이 눈에 부셨다. 젖지 않았다면 H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났을 텐데. 그 순간 소녀에게 하필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햇빛이 잘 들어오는 교실이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한 명이 이가 있으면 다 이가 옮아요, 이가 옮았다고 학부모님 전화가 왔어. 내가 이런 전화를 받아야겠어?


바로 며칠 전 할머니가 소녀의 머리를 참빗으로 빗어 주었다. 까만 이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할머니가 손톱으로 꾹 누르면 딱따악 재미있는 소리가 났고, 이는 빨간 피를 토하며 납작하게 죽었다. 머리 감기를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시절, 아이들의 머리에 이가 번져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 농사 지어도 되겠다며 우스개를 했었다. 그러나 소녀는 말하지 못했다. 내 머리에도 이가 있어요. 누가 소녀의 머리에 이를 알아볼까 겁이 났다. 그날 저녁 소녀는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머리를 감았다. 정성껏. 그리고 참빗으로 머리 밑이 얼얼해질 때까지 머리를 빗었다. 


소녀는 그 즈음 세상을 알아버렸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왜 그렇게 H에게 모욕을 가했는지 옷만 낡았을 뿐 결코 소녀보다도 더럽지 않았던 H에게 대했던 태도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열 살 소녀는 알았다. (안다고 믿었다.) 아이들에게는 어떤 꼬리가 숨어 있으며 그 ‘꼬리’를 학교와 선생님은 알고 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대하는 태도로 그 숨은 꼬리를 무섭게 인식하며 자란다. 소녀는 끝내 소원하던 전학도 가지 못했고, 복수도 하지 못했다. 대신 소녀가 어른이 될 때까지 H의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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