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자나?”
어둠을 울린 그 소리가 너무 낯설어 깜짝 놀랐다. 이렇게 어이없이 어린 목소리라니. 방금 전까지 소녀는 자신이 너무 많이 늙어 버렸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를 부르는 열 살 여자 아이의 가녀린 목소리를 적막 속에서 듣고 보니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구나, 이 지긋지긋한 어린 시절을 언제까지 견뎌야 할 지 문득 막막해졌다.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소녀는 이불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누워 있는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어스름한 달빛이 할머니의 주름진 콧잔등과 이마를 비추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소녀의 엄마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붓던 악한 사람은 간 곳 없고, 틀니를 뺀 늙고 볼 품 없는 노인이 누워 있었다. 이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 것일까.
소녀의 할머니는 장성해 출가한 자식들과 자주 싸웠다. 소녀와 소녀의 동생은 삼촌 둘, 막내 삼촌과 결혼한 작은 엄마, 그리고 고모를 향한 할머니의 지독한 원한과 저주, 욕설을 들으며 자랐다. 좆같은 새끼, 길에서 코를 박고 죽을 년, 니미 씨부럴 등의 욕설은 이제는 소녀에게 놀랍지도 않았다. 소녀의 막내 삼촌은 칼을 들고 죽인다고 달려드는 할머니를 막아내다가 화를 못 이겨 할머니 방의 유리창을 와장창 부수기도 했고, 작은 엄마는 할머니와 실랑이하다 제 풀에 넘어진 할머니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살인 미수라 주장했지만, 경찰은 친족 상해의 죄목으로 소녀의 작은 엄마를 불러 조사했다. 아들아, 너 나를 여전히 사랑하느냐? 딸아, 나를 엄마로 생각하느냐? 그냥 불러 앉혀놓고 다정하게 물어보면 좋을 것을, 할머니는 그 간단한 질문을 왜 자식들과 싸워야만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항상 소녀에게 쓸쓸한 의문이었다. (소녀가 어른이 된 뒤 할머니의 그 광기는 치매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아직 육십 대의 기운 넘치던 할머니가 병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이 노인네가 미쳤나, 라는 말은 자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소녀의 엄마 차례였다.
양반 집에서 귀한 막내로 곱게 자란 소녀의 엄마는 싸울 줄도 모르고, 할머니에게 욕을 들을 실수도 잘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가장 기대한 아빠가 결혼 후 말이 없어진 것이 엄마의 간교함 탓이라 생각했다. 소녀의 아빠는 사실 욕 잘하고, 걸걸하고, 싸움닭에다 화투밖에 모르는 당신의 엄마가 지긋지긋해서 가장이 된 뒤에는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어진 것이었지만 소녀의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에도 장남만큼은 배부르게 먹이며 귀하게 키워왔는데 이제 사장 소리 들으며 신수가 훤해진 그 아들은 늙은 엄마의 방문 한 번 열어보지 않았다. 소녀의 할머니와 아빠 사이 가장 힘든 것은 엄마였지만 그 원망은 오히려 소녀의 엄마가 고스란히 받았다. 웃음소리 한 번 듣기 힘든 이 덩치만 큰 이층집, 허울뿐인 이 ‘김 사장’네 집으로 시집 와 두 시동생과 어린 시누이까지 키워 낸 소녀의 엄마에게 눈만 흘기던 할머니는 어떤 핑계거리만 생기면 엄마에게도 비난을 퍼부었다. 이번에는 소녀의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할머니를 ‘공격한’ 피의자 신분의 작은 엄마 편을 한 마디 들어 준 것이 그 시작이 됐다.
할머니의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듣다 못한 소녀의 엄마의 항변은 울음과 섞여 힘없이 갈라졌다. 소녀의 엄마는 결국 할머니를 피해 베란다에 무릎을 꿇어 안고 앉아 훌쩍이며 울었다. 나 좀 보내 도고. 이 집은 나도 이제 고마 마 이제 지긋지긋 하다. 고만 내 집에 갈란다.
소녀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왜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생각했다. 엄마가 우리를 두고 간다. 엄마의 집이 아니라서……. 이 집은 소녀의 할머니의 집이기도 했지만 소녀가 태어나고 소녀의 가족이 모두 함께 사는 집이었다. 소녀의 집이고, 엄마의 집이고 아빠의 집이었다. 엄마에게 ‘내 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문득 엄마가 낯설고 멀게 느껴져, 이 집에서 괴팍하고 성질 사나운 할머니이지만 그런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소녀가 엄마의 편이 아닌 것만 같아 외롭고 서러웠다.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눈두덩이 뜨거워져, 소녀는 이불을 괜히 끌어 올렸다.
엄마는 오늘 밤 내가 할머니 곁에 있어서 서운할지도 몰라.
소녀보다 소녀의 남동생을 훨씬 더 예뻐하는 할머니인데도, 엄마를 그렇게 못 살게 구는 할머니인데도 그런 날, 소녀는 항상 할머니 곁에 있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애교 많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던 소녀의 남동생은 아빠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입바른 소리도 잘했고 엄마의 마음도 잘 풀어 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할 줄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엄마가 울고 있어도, 바보같이. 그렇다고 몸의 기운을 다 쏟는 발악 뒤에 벌벌 떨고 앉아 있는 할머니 옆에 아무도 없는 것도 소녀는 마음이 아팠다. 자식들한테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악다구니밖에 할 줄 모르는 늙은 사람의 인생이, 열 살 아이의 눈에도 불쌍하고 외로워 보여서 그래서 소녀의 마음이 더 고독했다. 소녀는 할머니의 편도, 엄마의 편도 들 수 없었다. 할머니 곁에 누워서 속으로 엄마 걱정을 했고, 엄마가 소녀의 마음을 몰라줄까 항상 불안했다.
나만 놓고 가버리면 어떡하지?
소녀는 가끔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철없는 동생이 너무 부러웠다. 왜 나만 이렇게 머리가 늙어버린 걸까?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는 문득 담배를 떠올렸다. 할머니 방의 벽지는 항상 담배 찌든 자국으로 누렇게 바래 있었다. 소녀의 할머니는 늘 방에서 담배를 피웠다. 할머니의 오래된 장롱에는 친척들이 올 때마다 사오는 ‘솔’이 박스채로 쌓여 있었다. 소녀의 엄마는 가끔 회상했었다.
“네가 겨우 기어 다닐 때 말이다. 엄마가 네 동생을 베어 배가 남산만할 때. 화투 손님들 밥 차리느라 너를 어쩔 수 없이 그 방에 들여 놓으면 너는 그 사이를 기어 다녔다. 재떨이도 만지고, 입에 아무 거나 넣고 했어. 화투 연기가 온통 부옇게 차 있던 그 곳에.”
방에는 담배 찌든 냄새가 옅게 베어 있었다. 담배를 오래 피우면 머리도 나빠지고, 빨리 늙고, 빨리 죽는 댔는데. 할머니의 낮은 숨소리를 들으며, 엄마와 함께 있을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며, 엄마를 걱정하며, 소녀는 결국 모든 것이 담배 탓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아기 때부터 담배 연기를 너무 많이 맡아서 쓸 데 없이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다고.
그날 밤 소녀는 엄마가 죽는 꿈을 꿨다. 꿈 속에서 엄마, 엄마를 부르다 깼더니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희미하게 압력 밥솥 밸브가 돌아가는 소리가 밸밸 들리고,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소녀의 엄마가 여느 때처럼 압력솥에 밥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