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의 이름이 김아기(한글)가 아니라 김악이(惡二)라는 것을 안 것은 내 나이 스무 살이나 되었을 때였다. 서울로 대학을 오기 전까지 같은 집에서 20여년을 함께 살았으면서도 난 할매 이름에 담긴 의미를 몰랐다. 셋째 딸로 태어나 이름 없이 아기야, 라고 불렸다고 했다. 출생 신고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해서 동사무소에 가신 할머니의 아버지, 나의 증조 할아버지는 김아기요, 라고 했고 동사무소 직원은 한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고, 문맹의 할아버지는 아무 한자나 알아서 해 주시오, 라고 했다. 당연히 이 모든 건 나의 상상이다. '아'와 '기'에도 그 소리에 맞는 아름다운 뜻을 가진 글자들이 무수히 많이 있을 테지만, 아마 그 시대의 그닥 현명하지 못했던 - 어쩌면 친일파 였거나 낙하산이었거나 대단한 꼴통이었거나 한 - 동사무소의 직원은 그냥 '악'에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악할 악자를 나의 어린 할매에게 선물해 주었다. 아기'와 '악이'라는 비슷한 발음을 가진 두 단어가 이렇게나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할매의 이름 덕분에 알았다.
어쨋든 나는 할매의 이름에 담긴 뜻을 안 순간, 생의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할매의 광기와 자식들을 향한 이유 없는 분노를 아주 어릴 적부터 보며 자랐다. 내 나이 여덟 살쯤 어느 날, 골목에서는 철 모르는 동네 아이들이 고무줄 뛰기나 땅 따먹기를 하고 있을 때 할매는 막내 삼촌에게 식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할매가 하는 대사는 비슷했다. 니 죽고 내 죽자, 이 호로 새끼야아. 할매가 비로소 그렇게 작은 몸으로 위험한 것들을 던지거나 휘두르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할매를 잡고 누군가는 반대편의 어른을 잡고 또 누군가는 울고 또 누군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을 나가 버렸다. 식칼, 부엌에서 요리할 때나 쓰는 그 번쩍거리고 위험한 그 칼 말이다.
나는 언젠가 할매의 이야기를 쓸 것을 예감했다. 한 때는 아기였을, 그리고 악(惡)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한 여자와 그리고 그의 마음의 굶주림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자식들과 그리고 당신의 첫번째 손이였던 '나'의 성장의 이야기를.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 어떻게 닿을지 나도 모르겠다.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순서 없이, 정해진 형식 없이 기록해보려 한다. 그렇지만 그 끝에 할매의 아기를, 우리 모두의 아기를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