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예 Jul 06. 2022

무뢰한, 그리고 헤어질 결심. 사랑 그쓸쓸함에 대하여

귀여운 옷 좋아하고 타인의 귀여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하고, “귀엽다”는 말 달고 살면서, 그리고 동화를 좋아하고 '삶은 아름다워' 글을 쓰고 싶으면서 사랑 영화는 예쁘고 말랑말랑한 내용을 좋아하지 않는다. 질척대고 구질구질한, 보고나면 너무 쓸쓸하고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한.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마음이 너무 비참해져서 눈물은 오히려 말라버리는 그런 사랑 영화가 끌린다. 예쁜 엽서 같은 일본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신랑과 그런 영화는 질색하는 부인이 한 집에서 살며 “정말 우리는 안 맞아.” 그러면서 산다. 


이런 나의 취향을 저격했던 영화가 있었다.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



내가 일시정지한 채로 한참을 말없이 보고 있었던, 내가 꼽는 <무뢰한>의 명장면.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도 모르는 실상은 나약한 형사, 재이 마침내 혜경에 칼을 찔리고 그대로 엉거주춤 혜경에게 기대어 서 있다.



(김남일 분)은 법을 수호하는 형사이지만, 사랑을 위장해 여자를 이용하고 범인을 잡는다. 빚 때문에 약쟁이와 쪽방에서 동거하며 삶의 밑바닥까지 처절하게 떨어진 여자를 기어이 찾아가서 한다는 말이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야." 이딴 비열하고 잔인한 말이나 던진다. 그러다 결국 혜경(전도연 분)의 칼에 무력하게 찔리고 피가 흐르는 배를 움켜쥔 채 걷는다. 이제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 비실비실 웃으며. 사실 재은 나름의 속죄의 길을 찾아, 혜경에게 뺨이라도 한대 얻어 맞고 싶어 거길 간 건지도 모른다.


왜 끝까지 재은 그렇게 혜경에게 무례하고 잔인하게 굴었을까.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남자의 사랑이라는 건 때로 너무 불친절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지독하게 여자에게 무뢰한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그 무례함은 사랑에서 온 것일까? 그의 혜경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지독하게 아프고, 절절지만 영화에서 친절한 사랑고백(그것이 대사이건, 인물의 행동이건)은 없다. "혜경씨가 나의 아픈 손가락이니까." 한 순간 지나갔던 재의 대사, 그것이 끝이다. 그것조차 형사인 재이 쫓고 있는 용의자를 잡기 위한 연기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재곤의 진심인지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으로 하여금 저들의 불친절한 사랑 행각이 진실이라고 믿고싶게끔 만든다. 그렇지만, 끝까지 재은 혜경에게 무례한 '무뢰한'이고. 철저히 나쁜 남자로 남는다. (나는 영화를 보고나서 착한 얼굴의 나쁜 남자, 김남길이라는 배우에 빠져서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어제 <헤어질 결심>을 보는데 어라, 스포 전혀 없이 갔더니 영화를 보면서야 <무뢰한>이 떠오른다. 두 영화 모두 형사가 용의자나 용의자 애인을 맴돌다, 흔들리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형사 용의자에게 서서히 물들게 되는 과정에 ‘잠복’이라는 은밀하고 매력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상대방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용의자가 매력적이라면, 충분히 현실의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먹는것, 숨쉬는 것, 우는 것, 웃는 것을 한 순간 한 순간 따라가면서, 그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물들게 되는. '잠복'은 영화 속에서 한 인물에게 빠지게 되는 훌륭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인물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장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해준(박해일 분)의 숨소리를 따라 서래(탕웨이 분)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며 나도 그녀를 어느새 옹호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강아지 같은 눈이라니.



관객도 따라 훔쳐보게 된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꽤 길었는데도 상영 시간 내내 보러 들어온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모두 좋아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불편한 영화라 생각하기도 했다. 영화를 잘은 모르지만, <헤어질 결심>은 그간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느꼈던 장점만을 살려 놓은 영화랄까. 그리고 대중성과 재미까지. 영화 분석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너무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 감독의 의도가 궁금해서 평론가의 분석까지 씹어 보는데 이 영화는 그 내용을 보지 않고 그냥 이대로 한 번 더 보고 싶다.)


<무뢰한>은 사실 너무 재미있다기 보다, 쓸쓸한 소설같은 영화다. 너무나 구질구질해서 화면으로 옮겨 놓으면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기는 힘든 스토리. 마지막에 제발 한 번 사랑한다거나, 보고싶었다거나 뭐 그런 말 한 번은 나오길 바랬지만 결국 재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흐느끼는 혜경을 떠나온다. 그리고 영화는 거칠게 끝난다. 음악도 뚜룩! 끊기며, 이게 뭐야? 싶게. 나는 오상욱 감독이 직접 쓴 이 시나리오의 밑바닥 사랑 이야기를 너무나 높게 평가했었다. 영화는 잘 모르고 영화 비평은 아예 젬병이지만, 제 감정에 취해 상대를 다치게 하는지도 모르는, 사랑 그 잔혹하고 쓸쓸한 이면에 대해 이렇게 잘 담아낼 수 있다니.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에서 깊어질수록 쓸쓸해지는 사랑의 이야기를 훌륭한 뷰와 미장센 등으로 재연했고, 슬프지만 아름답게 끝을 맺는다. 적어도 구질구질하진 않다. 비극의 결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마지막 장면이 '헤어짐'이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래는 결국 사랑하기 위해 헤어질 결심을 했고, 물론 쓸쓸했지만 서래의 사랑은, 이루어졌다. 이것은 내 기준이다. (그래서 대중은 이 영화에 더욱 호감을 느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상은 받았지만 재미없지 않아요." 자신있게 말했던 이유를 알겠다.)  


<헤어질 결심>이 좋았던 사람은 <무뢰한>을 한 번 보면 좋겠다. 두 영화를 비교해보면, 어떻게 박찬욱 감독이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했는지 나같은 무지랭이에게도 조금은 보인다. 참, 그리고 오상욱 감독은 일부로 화려한 장치를 일절 쓰지 않았다고 했다. 거친 사랑 그대로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박찬욱감독이 <무뢰한>을 보고 극찬했던 인터뷰를 찾았다.

분명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구!


https://tv.naver.com/v/387843



(그리고 나도 쓸쓸한 사랑 소설도 한 번 써보고 싶어졌다. 난 여자를 망가뜨리지 않을 것이다! ㅠ_ㅠ)




작가의 이전글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이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