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_1부
나의 첫 번째 인식
이 글은 내가 책 전체를 정독한 후에 쓰는 것은 아니다. 꼭 남겨놓아야만 할 것 같은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호기롭게 읽기 시작했다. 웬만큼 두꺼운 책도, 전문 서적이 아닌 다음에야 빨리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열 페이지쯤 읽다가 벌써 질려버리고 말았다. 인물에 대한 뚜렷한 묘사도,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이 화자의 심리 묘사가 짧지 않은 문장으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노인이 된 화자가 침대 위에 누워서 희미한 석유램프 불빛만을 의지해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데, 그 회상의 방식이 ‘천천히’ ‘맴돌듯’, 또 ‘더듬어 가는’ 느낌으로 다소 지루하고 답답하게 이어진다. (작품 속에서 기억을 더듬어가는 방식을 표현하고자 앞서 언급한 부사들을 굉장히 자주 사용한다. 내가 얼마나 급하게 책을 읽고, 사건 중심으로 훑듯이 읽었는지 사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게다가 유년의 기억이지만 고통, 몽상, 고독, 냉소 등으로 반복되어 표현되는 감정의 기억들로 인해 그다지 우울한 사건이 없음에도 저절로 우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진 것은, 사실 내가 잘못 주문해서 배송되어 온 초등학생용 도서 때문이었다. 무려 3-4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 다섯 권 분량을 딱 한 권의 만화책으로 요약해 놓은 책이 있는데, 만화책을 다 읽고(줄거리는 대강 알게 되었고) 그 리고 맨 뒤의 두어 페이지를 할애해 설명된 작품 설명을 읽고서야 무언가 강렬한 느낌이 나에게 내리 꽂혔던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제 차근히 써 볼 예정이지만 어쨌든 나는 다시 책을 찾아 펼쳐 들었고, 작품 설명에 언급된 발췌 내용이 나오는 부분부터 먼저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느껴지는 가벼운 전율. 나는 이 책을 일단 ‘공부’하고 싶어졌다. 다음의 두 가지 인식 때문이다.
첫 번째 인식.
그 어떤 위대한 예술가에게도 어머니와의 관계는, 작품 속에서 피해갈 수 없는 영혼의 뿌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프루스트의 아버지는 명망 있는 의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유대계 출신이었다. 여름마다 휴양지의 별장에서 휴가를 보낼 정도로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그의 소설 속 기억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결코 행복하거나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전체 300여 페이지의 중 80페이지 분량,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을 할애하여 화자가 계속해서 집착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머니와의 키스다.
“잠을 자러 올라갈 때 내 유일한 위안은 내가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와서 키스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프루스트는 아홉 살에 천식을 앓았고, 어머니의 지극한 보호아래 예민하고 유약한 어린 아이로 자랐다. 어머니와 떨어져 저택의 꼭대기 방에서 홀로 자게 된 ‘나’가 어머니가 밤 인사인 키스를 하기 위해 올 때는 얼마나 그 기대감에 설레고 행복했는지 어머니가 혹시 오지 못할 때는 얼마나 우울했는지, 어머니가 키스를 한 번만 해주고 가면 한 번 더 받고 싶어 얼마나 안달했는지, 그의 불안하고 외로운 심리가 계속해서 묘사된다. 프루스트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떠오르던 단 하나의 ‘의지적인 기억’은 어머니와 떨어져 자기 위해 제 방으로 올라가는 “홀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좁은 계단으로 연결된 두 층”이었다. 프루스트가 우연이나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는 유년에 이런 기억이 가장 강렬해, 라고 어쩌면 본인의 의지로 소환해내는 의식적인 기억(작품에서는 이를 ‘의지적 기억’, ‘지성의 기억’ 등으로 표현하며, 뒤에 나오는 마들렌에 의한 ‘감각에 의한 기억’과 대립시킨다.)이 어둠 속의 계단뿐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 기억은 작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어 세계적 ‘걸작’으로 인정받는 예술 작품을 탄생하게 한 것일까.
“마치 콩브레에는 좁은 계단으로 연결된 두 층만이, 단지 저녁 7시만이 존재한다는 것처럼 …… (중략) 나는 콩브레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마음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에게 있어 ‘좁은 계단으로 연결된 두 층’은 담배 연기로 누렇게 찌든 벽지가 보이던 할머니의 방이었을 것이고, ‘저녁 7시’는 할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던, 그리고 내가 오줌이 마려워 깼던 새벽일 것이다. 성장 소설을 써 보고자 마음먹고 썼던 나의 유년의 기억이라는 것이 내 열 살, 잠에서 깨 슬퍼하던 어느 밤이었다. 막연히 내 의식 속에 떠돌고 있던 그 슬픈 밤이 성장 소설을 시작해 보겠다, 마음먹자마자 가장 먼저 뚜렷하게 형상화 되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적이 있지 않은가. 특히 심리적으로 조금 성숙한 아이라면, 잠자리에 누워 빛의 굴절에 따라 달라지는 방 안 풍경들에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느끼며 자기 전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려보는. 나는 할머니의 담배 연기에 찌든 그 누런 벽지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곤 했다.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할머니와 싸운 사람, (할머니가 싸우는 대상은 다양했고 그 날만은 특별히 엄마였는데도, 그 날의 기억만이 유독 떠오르는 것이다.) 특히 엄마가 베란다에 앉아 나에게 “내 집에 보내도고.” 털어놓던 하소연을 끊임없이 곱씹었고, 엄마가 울고 있지 않을까 불안해했지만 가보지는 못하는 아이였다. 엄마가 그저 화가 나 한 말이었음을 다시 물어보고,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힘들까봐, 그리고 나 때문에 슬퍼 보이는 엄마가 더 싫었던 조숙한 아이이기도 했다.
"오히려 어머니가 화를 내시는 편이 내가 어린 시절에 알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다정함보다는 덜 슬펐을 텐데. 나는 이제 막, 눈에 보이지 않는 불경한 손길로 어머니 영혼에 첫 번째 주름살을 그었고, 첫 번째 흰 머리칼을 나타나게 한 것같이 느껴졌다."
올해 초, 아버지의 칠순을 기념하여 아버지의 형제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모였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잠깐 이야기 하고 싶다. 차려진 음식들을 즐겁게 나누고, 어느덧 술이 얼큰해진 어른들에게서 가장 아픈 유년의 기억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칠순이 된 아버지는 이가 썩어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아팠던 어느 날, 너무나 무지했던 할머니가 입 안에 된장만 발라 놓고 어디론가 가 버렸던 그 날의 기억을 설움에 받친 목소리로 털어놓았으며, 내일 모레 환갑이 되는 나의 막내 고모는 화투판에 빠져 운동회에도 오지 않았던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며 쓸쓸하게 웃었고, 결국 불행한 결혼생활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린 나의 잘생겼던 막내 삼촌은 할머니의 욕설과 저주를 들으며 죽고 싶었던 그의 젊은 날들을 떠올렸다. 나는 (어쩌면 내가 그 즈음 계속해서 어머니와 자식 간의 관계, 너무나 신비스럽고 한편으로 무섭도록 놀라운 힘에 대해 생각해오던 즈음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유년시절의 결핍이나 상처는 어쩌면 뼈 속 깊이 각인되는 것이구나, 평생 어른이 되지 못하고 이성의 애정을 갈구하는 이 초로의 노인들을 보며 나의 가설이 얼추 맞는 것만 같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그리고 나는 왠지 대물림되는 ‘결핍’의 비밀에 손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아 철없는 척 하며 한 마디 더 물었다. “혹시, 할머니는? 할머니는 어떻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나한테 이야기해 줄 사람 없어요?”)
사실 이 작품이 새벽 달빛에 비추인 할머니 방을 떠올리는 나의 단편적인 회상, 그리고 너무나 단순한 나의 첫 번째 인식처럼 어머니와의 키스를 갈구하던 그 밤, 저녁 7시 어머니와 헤어져 계단을 올라가는 어두운 장면에서 끝이 났다면, 어머니와의 관계가 주인공의 전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억인 것처럼 그려졌다면, 이 작품은 ‘프랑스 문학의 최대 걸작’, ‘인간의 상상력이 이룩한 가장 심오한 위업 중 하나’로 평가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이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을 정복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의 정복에 앞서, 일단 나의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 마음먹은 것은 다음의 두 번 째 인식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