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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Jul 13. 2022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_1부

나의 두 번째 인식

두 번째 인식.

내가 떠올려 왔던 나의 유년은 어쩌면 ‘한 조각 벽면’일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너무나 중요해 전문을 옮겨 본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이처럼 콩브레에서 내 잠자리의 비극과 무대 외에 다른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지도 오랜 어느 겨울 날, 집에 돌아온 내가 추워하는 걸 본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홍차를 마시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바뀌었다. …… (중략)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중략)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 전까지 화자에게 있어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잠자리의 비극, 그리고 그 잠자리를 비추는 무대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마음조차 없었고, 그래서 그에게 그 외의 모든 기억은 죽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에게 전혀 다른 국면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한 잔의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으며 형용할 수 없는 행복함과 함께 ‘우연히’ (‘우연’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마들렌과 홍차의 맛과 냄새에 의해 떠오른 유년의 기억은, 앞서 첫 번째 인식의 의식적인 ‘어두운’ 기억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유년 시절의 감미로운 추억들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두 부분만 발췌해 보았다. 


마들렌을 먹기 전

이처럼 오랫동안 한밤중에 깨어나 콩브레를 회상할 때면, 마치 벵골의 섬광 신호등이나 조명등이 건물 한 모퉁이를 선택해서 비추면 다른 부분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처럼, 콩브레는 언제나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잘리는 빛나는 한 조각 벽면으로만 떠올랐다.


마들렌을 먹은 후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뿐이었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이 꽃들이, 비본 냇가의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내가 글을 쓰며 점점 갖게 되었던 의구심이 있다. 분명히 나의 외로웠던 어린 시절, 그리고 나의 불행했던 할머니와 나의 부모에 대해 발가벗는 심정으로 쓰고 있는데도 쓰면 쓸수록 그것은, 그저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나의 기억에 대한 원천적인 의심이다. 나의 첫 성장 소설에 등장했던, 할머니의 방에서 떠올렸던 엄마는 분명히 무력하고 슬펐으나, 한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린 딸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그 웃음, 우리의 버려진 단추를 쓸어 모으던 엄마의 습진에 짓무른 손가락이 글 속에서 슬며시 떠오르기도 하고, 자식 앞에서는 어떻게든 싸우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나와 동생의 눈치를 살피며 황황히 나가던 나의 아버지의 어수룩한 표정도 나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꼬맹이의 표정을 하고 다녔다. 비교적 부유했던 환경에 유명 초등학교의 교복, 좋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였음에도 손가락을 빨며 남의 눈치를 보던 그 자존감 낮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십 대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어쨌든 글을 쓰면서, 그리고 이웃들의 글을 읽으며 내 안의 한 때 고통이라는 것이 지나고 보면 사실은 다 고기서 고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쩌면 어린 시절 머리만 쓸데없이 굵어 나 혼자 세상 짐을 다 진 것처럼 착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나의 성장 소설을 할머니의 방 장면으로부터 무척 어둡게 시작하긴 했는데 (소설뿐만 아니라, 다른 에세이를 포함해) 글을 쓰면 쓸수록 나의 유년이 그 장면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나의 성장 소설의 갈피는 잡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러 번 썼었다. ‘집은 항상 전쟁터 같았다.’ 고. 그런데 요즘 묻게 된다. 정말 매일이 전쟁터였어? 그게 다야? 그게 네 어린 인생의 전부야? 그런데 이렇게 네가 지금의 모습으로 자랐다고? (엄마의 조용하고 한결같았던 사랑과 희생, 결핍을 끊어내고자 몸부림했던 아버지의 쓸쓸한 분투, 할머니의 서툴지만 뜨거웠던 첫 손녀에 대한 정, 난 그것에 대해서는 미처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슬금슬금 나의 그 기억들이 내 글 속에서 등장하는 것을 남의 글을 보는 듯 나 역시도 '보고' 있다.)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8개월. 매번 나의 첫 독자가 되어주는 나의 신랑이 최근 하는 얘기가 있었다. “그 소재는 제발!” 열 살의 그 날 밤, 그리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던 할머니의 방은, 나에게는 내 유년의 인생 전체의 분위기를 잠식한 큰 사건이었고 시로도 에세이로도 또 리뷰에 넣어 회상하여도 지겹지 않은 어마어마한(?) 기억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 번 듣는 이야기인 것 같은 것은, 나의 글들은 아직까지는 “한 조각 벽면”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아 그랬구나! 망치로 얻어맞은 듯 깨닫게 된, 두 번째 인식이다. 물론 그것이 왜 나의 잘린 벽면의 기억으로 남아있는지는, 프루스트가 그랬듯 좀 더 확인해보아야겠지만 말이다.


내가 찾는 진실은 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 정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오로지 정신만이 실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 마주하고 있다. 


조금씩 떠오르는 잘린 벽면 뒤편의 기억들. 나에게도 ‘마들렌을 입에 베어 무는 것과 같은 경험’이 언젠가 올 수 있을까. 할머니의 어둡고 쓸쓸한 방이 아니라, 엄마와 할머니가 싸우던 그날 밤이 아니라 그 장면 밖의 공간들이 서서히 떠오르며 내 유년에 영향을 끼친, 모든 사람들, 내 영혼의 비밀을 밝혀줄 모든 사건들을 밝히 볼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나도 기대해본다. 사실 작품 속에서는 단지 홍차에 찍은 마들렌을 베어 무는 순간 모든 것이 우연히 떠올랐다고 했지만, 작가가 다른 부분에서 언급했듯 끊임없이 ‘정신이 진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심연의 그 어떤 것을 포착’하기 위해 집중했을 것이다. (프루스트는 코르크 마개로 외부 소음을 차단하고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흘러간 시간들과 사투를 벌였다고 했다. ) 나도 그래서 나의 힘이 닿는 한 써 보려 한다. 무엇이든 내 마음에 떠오른 것이 생각날 때마다. 이것이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고,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나의 성장 소설로 그냥 끝날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싶어서다. 그 빛나는 청춘을, 말 없고 외롭게 흘려보낸 나의 아까운 시간들을. 어쩌면 그 시간 속에서도 삶의 진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추억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글을 쓰는 것, 추억을 회상하는 것은 이미 흘러간 시간일지라도, 시간을 역행하여 자아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리뷰 쓰면서 자세히 읽을수록 놀라운 책이다. 괜히 고전이 아니구나. 뭐 이렇게 쓸데없이 어렵게 썼데? 무식했던 21세기의 독자를 용서하소서. 글을 쓰는 것으로 인해 자아를 찾고자 몸부림 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같이 꼭 읽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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