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에서, 한 여인과의 입맞춤

마음의 산책: 수필

by 하태수 시 수필



고추밭에서, 한 여인과의 입맞춤


해마다 여름이면, 시골 고추밭은

전쟁터 가 된다. 사람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요, 더위는 사정없이 내리 꽂

히고, 그 속에서 허리 굽힌 할머니들의

땀은 고추보다도 붉다.


밭은 한두 마지기 수준이 아니다.

많게는8마지기, 3천 평 가까운 밭에서

고추농사를 짓는다. 새벽 5시, 봉고차

로 도시 아파트 단지들을 돌며 어르신

들을 태워 온다.주로 할머니들. 70대는

기본이고, 80이


넘은 분도 종종 있다. 하루 품삯 10만원

에, 새참 막걸리 한 잔, 빵 한 조각,

쮸쮸바 하나. 돈이 급해 나온다기보다는,

몸이 허락하는 한 누군가에게 손 벌리지

않겠다는 그 자존심이 그들을 밭으로

이끈다


밭일은 쉽지 않다. 검정 비닐멀칭 위의

고추밭은 지옥처럼 덥다. 비닐 밑 흙 온도

가 40도가 넘고, 숨 쉬기도 버겁다. 오후

두 시만 돼도 이마의 땀은 폭포수고, 누가

먼저 쓰러 질까 조마조마하다.


그래도 할머니들은 잘 안 쉰다. 자식들

눈치, 남들 말 한마디에 상처받기 싫어

서다. 그 와중에도 웃음은 있다. 시골 할

머니들은 일머리가 있어서, 중간에 슬쩍


그늘로 빠져 농땡이도 좀 피우고, 막걸리

한 모금에 옛 노래 한 가락 부르며 고된

하루를 달랜다.


반면 도시에서 온 할머니들은 첫날엔 멋

내고 온다. 빨간 립스틱에, 세련된 모자,

색 맞춘 옷차림까지. 하지만 그 멋은 더위

앞에 오래 못 간다. 오후만 되면 윗옷 풀어

헤치고,


배꼽 드러내고, 브래지어도 벗어던지고,

이게 뭐 멋이야, 살자고 하는 거지!” 하며

웃는다.


막걸리 몇 잔 돌아가고, “여자의 일생”

이나 “황성 옛터”가 흘러나오면 분위기는

장터가 된다. 춤사위 곁들인 노래 한 자락,

할머니들끼리 서로 애교 섞인 농담, 잊었던

흥이 피어오른다.


그런데 그날은, 그 흥 속에 가슴 철렁한

일이 벌어졌다. 고추밭 조장이던 한 할머니

가 그만 쓰러진 것이다.


평소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꼿꼿했던 분.

말없이 땀 흘리던 그분이 갑자기 쓰러져

선 숨도 안 쉰다. 모두가 우왕좌왕, 휴대폰

으로 119는 불렀지만 시골 골짜기까지

소방차가 오는 길이 멀다.


발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는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그녀를 서늘한

그늘로 옮기고, 겹겹이 입은 옷을 하나

하나 벗겨내며 숨통을 트이게 했다.


숨소리는 없고, 몸은 축 늘어졌지만

어딘가 살아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조심스레 그녀의 콧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내 입을 가져다 대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입맞춤, 그것은 입술을 대는 순간

이 아니라 마음을 모으는 일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내 입에서 그 숨결

을 조심스레 불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가슴을 눌렀다. 누르고 떼고,

누르고 떼고. 수십 번을 반복하며 시간은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0분쯤

지났을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본 듯한 순간이 왔다.


멈춰 있던 그녀의 앞가슴이 아주 조심

스럽게,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지켜봤다.


그러더니 몸 전체가 작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 미세한 움직임, 미동(微動). 그 작디

작은 떨림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괜스레 가슴이 미어졌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눈물이 터질 듯

올라왔다.


마치 풀잎 끝에 맺힌 이슬처럼, 눈가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은 흘러내릴 틈도 없이

떨렸다


‘살아났다... 정말 살아났다...’ 나는 그녀

를 꼭 안았다.


내 몸의 기운과 마음의 마지막 한 조각

까지 쏟아, 그녀를 붙들었다.


살려냈다. 내가 아닌, 이 뜨거운 여름과

그녀의 지난날과,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이 밭이 함께 살려낸 것이다.


지금도 길거리나 5일 시골 장날에 경운기

몰고 털털 거리며 달리던 신장로길

우연히 마주치면


“내 은인. 나 살려준 사람.”

그 웃음은 여전히 해맑고, 그 손길은

여전히 따뜻하다


고추밭에서 나는 땀보다 더한 인간의

진심을 봤다. 그리고 그 뙤약볕 속에서,

어쩌면 나는 한 생명을 살린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무심했던 마음 하나를 되살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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