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책: 수필
아버지께서 보따리 달랑 매고 대문을
나선다
오늘은 아버지(95세)와 함께 집 마당
앞 비닐하우스의 차광막 작업을 하게
되었다. 하우스는 가로 6미터, 길이 25
미터 크기의 것이 두 동이 있다. 먼저
한 동에 검정 차광막을 씌우기로 하고,
높이 5미터 지점에 나일론 끈을 묶어,
사다리를 타고 내가 그 위로 올라갔다.
그때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모서리 한쪽만 먼저 올려 주세
요.”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소리를
치셨다. “이놈아, 네가 묶은 거 말고, 내
가 묶어둔 데로 올라갔다가 내려와!”
나는 위태로운 사다리 위에서 떨리는
다리로 대답드렸다
.
“아버지, 제가 묶은 거나 아버지께서
묶은 거나 똑같습니다. 그냥 아무 데나
올려 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께서 버
럭 소리치셨다.
“이놈이 아비 말을 우습게 아느냐!”
“잘 묵고 잘 살아라, 이놈아!”
그리고는 내동댕이치듯 작업장을 떠나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이를 지켜보시던 어머니께서 한마디
하셨다.
“영감, 묶은 줄이 뭐 다르다고 이놈
저놈 욕을 해가며 성질을 내시우?”
그렇게 해서, 하우스 작업장에서의 첫
번째 부자 간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그날 저녁, 느닷없이 아버지께서 낡은
양복에 나까오리 모자를 쓰고, 손에
검은 보따리를 들고 식탁 앞에서
어머니를 향해 외치셨다.
“어이, 할망구! 날 따라와!”
대문을 나서려 하시는 그 모습에 나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작정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꼭 이수일이 된 듯, 무릎 꿇고
매달렸다.
그러자 아버지의 오른발이 옆차기로
날아왔다.
“놔라, 이놈아!”
“네가 백 살을 먹어도 내 눈에는 그냥
애야!”
“내 새끼야, 알아 몰라!”
그렇게 걷어차이고 밟히며, 나는 유도
3단의 체면도 없이 나뒹굴었다.
아버지의 무작정식 공격엔 그 어떤 방어
도 통하지 않았다. 유도의 메치기, 굳이
기, 꺾기 전법이 다 무용지물. 아버지의
기술은 마치 이종격투기 같았다.
그때 아내가 외쳤다.
“범식이 아빠, 괜찮아요?”
그 소리에 아버지의 손이 주춤 멈췄다.
그렇게 1막 1장, 2막 1장이 끝났다.
나는 아버지의 보따리를 빼앗다시피
해서 방에 두고, 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잠시 후,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식탁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나 넷이
마주 앉았다.
그런데 최고 보스인 아버지께서 자리를
잡지 않으시니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영감, 큰아들이 내일모레면 칠순인데,
며느리 앞에서 이놈 저놈 하시면서
그게 뭡니까?”
그러자 아버지께서 또 버럭,
“이 할망구가!”
이번에는 어머니와의 3막 1장이 시작
되었다.
결국 어머니께서 비장의 카드, 아버지
의 과거 바람기 30년 전력 중. 숨어 지낸
"삶을 비겁하게 꺼내셨다"
.
“영감 보세요, 수십 년 바람피우고
이젠 자식까지 때려요?”
어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식탁 위를
맴도는 순간, 아버지께서 기어이 고개를
숙이셨다.
“어이, 할망구... 좀 참아라. 미안하다.”
늙은 호랑이도 마누라 앞에서는 꼼짝
못 한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
아버지께 얻어맞은 옆구리가 아직도
쑤셨지만,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그래, 남자는 젊을 때 잘 살아야지.
바람 많이 피운 죄로 늙어서 마누라 앞
에선 꼼짝도 못 하는구나.
'
결국 3막 2장에서 어머니의 일격에
아버지는 K.O. 패 당하고야 만다.
그래도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지만, 그 자존심 하나
는 끝내 주셨다.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아버지의 이 성질만은 돌아가실 때까지
지켜 드리자.’
얼마 후, 아내가 디저트를 내왔다.
과일과 오차 한 잔, 그리고 뚱땡이 애교.
“아버님, 이것 드시고 마음 푸세요.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나도 정신지체 아이처럼 실실 웃으며
아버지께 애교를 부렸다.
“아버지, 보따리 열어보니 빤쯔 한 장,
러닝 하나뿐이던데, 그걸로 어머니랑
어딜 가시려고 나가자 하셨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침묵으로 답하셨다.
아무 말씀 없이 사랑방으로 들어가시며,
문을 닫기 직전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 옆구리 안 다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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