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책: 수필
울 엄마 요양시설로 보내며 울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쩌면 요양시설 은
당연한 선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구
나 바쁘고, 다들 생계에 쫓기고, 누군가
의 노후를 온전히 책임진다는 건 더는
쉽지 안 은 일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당연함' 앞에서 나는 끝내
울고 말았다. 울 엄마를 요양시설에
모시던 그날, 나는 자식이라는 이름 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흔을 바라보는 울
엄마는 몇 해 전 고관절 수술을 받은
셨고, 그 뒤로 치매 증상이 점점 깊어
졌다.
국민 건강보험공단에서 발급받은 장기
요양등급 판정서, 진단서, 보호자 동의
서 까지…수북한 서류를 가방에 챙겨
넣고, 강원도 어느 노인요양 시설로
엄마를 모시고 가는 길.
하루 종일 햇살은 밝았지만, 내 마음엔
흐린 구름이 가득했다. 요양보호사의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엄마
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말씀하셨다.
“야아 야, 여기가 어디고…?”
그 한마디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게도 강하고 의연하던 엄마의 모습
은 온데간데없고, 낯선 공간에 겁먹은
아이 같은 눈동자만 남아 있었다. 말없
이 눈물이 흘렀다.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느라, 손수건이 연신 눈가를 훔쳤다.
엄마는 평생을 자식만 바라보고 사셨다.
아들 넷,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키고,
장가보내고, 손주까지 받아 키운 엄마.
낮에는 부업으로 돈을 벌고, 밤에는
새벽까지 김장을 하시며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셨다.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없이, 언제나
"잘 돼야지"하시며 등을 토닥여 주셨던
분. 그 엄마를 나는 지금 요양 시설에,
그것도 외딴 지방으로 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여전히 막내 손주들의 이름을
부르 신다.
“수진이냐? 수연이냐?”
그 아이들, 직접 받아 안아 키우셨고,
학교 보내며 도시락 싸주시던 그 손주
들. 치매가 깊어졌는데도 그 기억만은
선명하게 남아 계신다. 그 손주 이름을
부르며 눈가를 적시는 엄마의 모습에,
나도 같이 울었다.
요즘 세상은 가족을 '개인'이라 부른다.
함께 살아도 각자 방이 있고, 서로 안부
도 카톡으로 묻는다. 편하긴 하다. 갈등
도 덜하다. 하지만 그만큼 정은 멀어진
다.
손끝으로 전하는 온기는, 가슴까지 닿지
못한다. 어쩌면 요양시설이라는 공간은,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가족의 풍경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풍경 속에 어울
리지 못한다. 엄마의 방을 나서며 마지
막으로 등을 어루만졌을 때,“잘 있어요,
엄마”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다
끝내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그저 “내일 다시 올게요”라는 빈말을
남기고 돌아 서야 했다. 자식 넷 중,
그날 그 자리에 함께한 이는 나 하나뿐
이었다. 형제들도, 며느리들도, 손주들
도…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보는 창밖엔 여전히 겨울
햇살이 들고 있었지만, 나는 그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날의 햇살은 유독
싸늘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내어준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에게 아주 조금만
내어 줘도 버겁다 말한다. 이건 비단
내 이야기 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초상일 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이 글을 통해 엄마께 다시 말씀드리고
싶다.
“엄마,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오래도록 고마웠어요.”
그리고 그 마음이 바람결처럼 엄마의
귓가에 닿기를 바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마음의 요양'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은 점점 멀어지지만, 마음만큼 은
다시 가까워져야 할 때다.
눈물로 보낸
그 하루가, 내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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