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책: 수필
어머니의 천사와 공주병
우리 집 어머니는 올해 아흔이다.
고운 세월을 얼굴에 얹으셨지만,마음
만큼은 여전히 열일곱 살 처녀처럼
생기발랄 하다.아니, 딱히 생기발랄하다
기보다는‘공주병’과 ‘천사병’을 함께
앓고 계신다.
어머니와 대면하면 누구든 간단치 않다.
이웃이든 친척이든, 손자든 며느리든,
커피 한잔 들고 앉기만 하면 어김없이
시작된다.
"내가 처녀 땐 말이다…"
그 옛날, 마을 총각들이 두 줄로 서서
어머니를 보기 위해 줄을 섰고, 누구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줄 알고 넋을
잃었다고 하신다.
이 이야기를 어머니는 아흔 살이 되신
지금까지, 무려 ‘101번째’들려주신다.
"엄마, 제발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좀 하셔요!"해도 소용없다.
한 번 입을 여시면 어디든 따라가시며
끝까지 하셔야 직성이 풀리신다.
비닐 하우스든, 부엌이든, 방구석이든,
청중 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무대가
된다.
어제 아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 집사람,며느리까지 오순
도순 아침밥을 먹고 커피 타임이 시작
되자 "어머니의 ‘천사 이야기’도 함께
시작 됐다.
"그때 개똥이네 집 총각이 참 잘생겼지.
연꽃 한송이를 이렇게 들고 와서 말이야,
나한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소’
하더 라니까."
그 말씀을 곁에서 듣던 며느리는 고개
를 끄덕이다가 그만 꾸벅 졸았다.
"어미야! 자냐?"
"네, 어머님… 잠시 졸았습니다."
"어멋! 시어머니 말 듣다가 조는 며느리
가 어딨어!
교양머리가 그렇게 없어서야 되겠니!"
"죄송합니다, 어머님."
그러면서도 며느리는 슬쩍 맞장구를
친다."그때 개똥이네 총각이 어머님
한테 홀딱 반하셨잖아요, 그렇죠?"
그 한 마디에 어머니는 입가에 거품이
일 정도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신다.
이야기 속 총각은 날마다 잘생겨지고,
연꽃은 매번 더 커지고,어머니의 미모
는 해가 갈수록 빛을 발한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우리 집사람도
어느새 졸고 있고, 며느리 는 외우고
졸고 를 동시에 하는 ‘신공’을 펼치고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레퍼
토리라 졸아도 다 외우는 셈이다.
그때, 대청마루를 지나가던 아버지가
딱 한마디 던지신다.
"또 병이 도졌나?
인제 그만해라. 큰아이야, 어미야,
너 이리 와서 고추 모종 포토에 담아라.
그리고 너희 어머니 말 다 듣지 마라.
바쁜 아이들 붙들고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러고는 덧붙이신다.
"내가 그렇게 못생겼나?"
그 말에 어머니는 이내 얼굴이 불쾌해
지며 버럭 소리를 지르신다.
"저놈의 영감탱이! 동네 수캐 혼신이
덮어씌워서 내 젊은 시절다 망쳐놨다!
"왜 아직도 안죽고 왔다 갔다 하나 몰라!
염라대왕이 술 취했나, 왜 안 잡아가니!
그 순간 나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그 옛이야기
가 이제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가족
의 웃음이 되었다.
어머니의 공주병과 천사병은 이젠
병 이라기 보다 가족사 속 향기로운
사연이 되어 버렸다.
부드럽게 삐딱한 그 자존심, 말끝마다
비치는 자기애~그 모든 것이 나는
참 좋다.
오늘도 어머니는 옛이야기를 꺼내
실 것이다.그리고 나는 또 웃고, 또
들어 드릴 것이다.
그 시절, 총각들이 줄 서던 공주.
이제는 우리 마당의 왕비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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