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안나 May 26. 2017

소주는 '린'이지

시골에 내려와 방을 얻고 밥집을 오픈하며 한 달을 정신없이 지냈다. 이번 달 달력을 찢다 문득 동창들 생각이 났다. 밥집 개업식에 와 다 식은 칼국수를 먹고 간 친구들은 잘 있으려나. 만나자고 해볼까 하다 미안한 마음이 남아 그만두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바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도시의 화려한 밤이라든가, 친구들과의 시끌벅적한 술자리 같은 것을 그리워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문자라도 해볼까.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는 자주 만났던 친구들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 비가 오면 비가 와서 한잔하고, 우울하면 우울해서 한잔했다. 각자 사는 모습은 달랐지만, 하루 일을 끝내고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하는 얘기들은 어릴 때와 다른 것이 없었다. 편의점 앞에 앉아 한참을 낄낄거리다 동네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고, 노래방에서 발광을 하다가 기계가 넘어지는 참사를 함께 겪기도 했다. 하, 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에 삼겹살 먹을 건데 나올래?"

"좋지. 어디로 가면 돼?"


아이, 부끄러. 친구의 전화에 서울에 올라가기 전 반복 훈련했던 것을 복기하며 '파블로프의 개'처럼 단숨에 답했다. 한 달 만에 보는 친구들이다. 울라울라, 울라울라. 의자 위에 올라가 달력을 찢다 신이 나 덩실거리고 말았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집에 와 음식 냄새가 밴 머리를 감고 화장을 다시 했다. 잘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한 달 만에 외출하면서 음식 냄새 풍기며 후줄근한 옷을 입고 싶지는 않았달까.


룰루랄라. 준비를 마치고 친구 부모님네 횟집으로 갔다. 그 횟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탁 트인 바다가 전면에 보이고 싱싱한 횟감이 언제나 팔딱거리는, 그야말로 진짜 횟집이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삼겹살. 우리는 횟집 앞 바닷가에 상을 차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고기가 노릇노릇 익고 있었다. 짝으로 가져온 술병을 만지작거리며 친구가 말했다.


"한 쌈 하자. 뭐 마실 거야?"

"음... 참이슬???

"에이, 소주는 린이지."



그럼 그냥 처음부터 '린' 먹으라고 하지 왜 물어본 거야? 그건 그렇고. 서울사람 놀이에 심취해, 충남 소주 '린'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동창들과 모여 술을 마실 때면, 늘 '린'이었다. 가슴 끓는 애향심 같은 건 아니고. 그냥 술이 빨리 깨고, 숙취가 없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랄까.


"꼴, 꼴, 꼴, 꼴."


소주의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가 바닷가에 청명하게 울렸다. 오늘의 삼겹살 멤버는 나에게 전화를 한 주선자와 나, 주선자의 매제, 또 다른 동창과 그의 회사 후배, 그들의 친구로 보이는 어떤 이. 이렇게 여섯이었다. 낯선 이와의 술자리를 시작하기 전에 통성명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 날이 어두워 서로를 못 알아볼 지경이 되기 전에 낯선 이를 소개받았다.


"얘는 작년에 이 동네로 왔는데 배 엔진을 고쳐."

"아... 안녕하세요. 전 얘네 초중학교 동창입니다."


동네 친구들을 직업으로 소개하자면, 물고기를 잡는 아이도 있고, 슈퍼를 하며 좌대를 운영하는 아이도 있고, 회사에 다니는 아이도 있다. 오늘부터는 여기에 배 엔진을 고치는 아이도 합류.  신기한 건 회사 다니는 아이가 데려온 회사 후배가 배 엔진 고치는 아이가 어릴 때 살던 집의 윗집에 살던 아이라는 것. 더 신기한 건 그걸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모두 짝이 있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음식과 술이 되어야만 한다.



좀처럼 낯을 가리지 않는 나는, 아는 남자들과 낯선 남자들 틈에 끼어 열심히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친구의 친구들이라 그런지 대화를 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린을 마시고, 근처 술집에서 맥주로 입가심을 했다. 오랜만에 외출은 그렇게 술 냄새 풀풀 풍기며 끝이 났다.


이불도 안 덮고 방에 눕자, 나도 모르게 스르르 미소가 떠올랐다. 엠티 온 것처럼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드넓은 바다에 우리만 있으니, 옆 테이블 떠드는 소리에 신경질 낼 필요도 없었다. 영혼까지 풍족해지는 술자리였다. 그날은 아주 오랜만에 풍류에 취해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방 한 칸이 갖고 싶었을 뿐이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