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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May 30. 2017

버스는 혼자만의 시간을 싣고

“갔다 올게.”     


점심 장사를 마치고 읍내에 나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이라고 해봐야 버스 그림이 있는 작은 표지판 하나가 전부인데, 가게에서 길만 건너면 바로다. 버스를 기다리며 가게를 건너다봤다. 손님도 없는데 뭘 하는 건지, 엄마 혼자 오종종 바쁘게 움직인다. 엄마가 뭘 하는지 알아챌 새도 없이 버스가 온다. 저 멀리 구부러진 길 끝에서 동네를 가득 메울 듯, 노란 버스가 부르릉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삑!”     


시골에 와 카드로 버스비를 낸 건 처음이다. 급하게 나와 동전을 챙기지 못한 탓도 있지만, 시골 버스에서 카드로 버스비를 내는 일이 잘되는지 확인해보고 싶기도 했다. 개업을 한 뒤 버스를 타고 읍내에 나갈 일이 없기도 했지만, 동네의 생김이나 어릴 때의 기억이 카드보다는 동전을 먼저 꺼내 들게 했다. 주머니 속에 동전을 넣고 달그락, 달그락 개수를 세며 버스를 기다리던 어릴 때의 설렘을 오늘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버스에 타 뒷자리에 앉았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이용하는 버스이니만큼, 앞자리에 앉으면 몇 정거장 못 가 양보할 확률이 높다. 양보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읍내까지는 40여 분. 간헐적 레이싱을 하는 버스에서 40여 분 동안 서 있고 싶지는 않았다. 자리에 앉아 습관적으로 가방을 뒤적였다. 이어폰, 내 이어폰이... 없다. 흠. 백 년 만에 혼자 있게 됐는데, 듣고 싶은 음악을 실컷 들을 수 있게 됐는데 아쉽다.     


“아이고. 여기저기 안 아픈 디가 없어. 병원 대니다 날 샌대니께.”

“그려. 나도 맨날 약만 몇 보따리씩 들고 대녀. 지겨워 죽겄어.”     


딱히 할 일이 없어 두리번거리는데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들의 대화가 들렸다. 며느리가 사 온 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시원하니 좋다는 둥, 제주도 갔을 때 무릎에 좋다는 말뼈 가루를 샀는데 효과가 그만이라는 둥, 어느 집 며느리가 집을 나갔는데 시어머니 얼굴이 더 좋아졌다는 둥. 앓는 소리가 반, 이야기 소리가 반. 이야기는 두서없이, 별다른 대꾸 없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할머니들의 대화에 자꾸만 웃음이 나 멋쩍게 차창 밖을 봤다. 초여름을 앞두고 싱싱함을 한껏 뽐내는 풀빛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 밭에 뭔가를 심으려고 파놓은 고랑들 뒤로 송전탑도 보였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흙바닥에 뒹굴던 밀양 할머니들이 생각났다. 앞자리에 앉아 큰 걱정 없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저 할머니들도 평탄한 삶만 산 건 아니겠지.



서울에서는 빽빽한 지하철을 타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아무 생각 없이 캄캄한 차창만 바라봤는데, 시골에 오니 버스에도 볼거리, 들을 거리가 넘쳤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읍내에 도착했다. 사실, 읍내에 나온 특별한 이유는 없다. 시골 생활이 답답해 혼자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싶었을 뿐. 버스에서 내려 큰 고민 없이 서점으로 갔다. 독자층이 다양하지 못한 서점에는 참고서가 주를 이루고, 베스트셀러가 일반서의 거의 다였다. 필요한 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도시의 대형서점에서처럼 다양한 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둘러볼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부터 이 서점을 지날 때면 꼭 들렀는데, 책의 생김이 좋아서, 책장을 넘길 때의 감촉이 좋아서 십여 분 서성이다 나오곤 했다.


그렇게 오늘도 서점을 잠시 서성여 잡지 한 권을 산 다음, 동네에선 구할 수 없는, 그토록 먹고 싶던 아이스초코를 샀다. 가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야금야금 아이스초코를 마시며 차창 밖을 봤다. 새로 산 잡지는 가방에 넣은 지 오래다. 가게에 도착하면 저녁 손님 맞을 준비와 가족들의 대화로 혼자만의 시간이 산산이 부서지겠지만, 그래도 좋다. 아이스초코 한 잔과 버스 드라이브로 혼자만의 시간을 충전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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