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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Jun 16. 2017

효녀의 석고대죄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빴다, 더 나빴다 한다. 뭐 하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지나치게 예민해져 기분이 많이 가라앉았다. 덕분에 사회생활을 하며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줬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지금 기분이 상당히 안 좋으니까 저리 가줄래요?"


"안나 씨, 이건 왜 이렇게 된 거야?"

"저번에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나의 더 나쁜 감정은 후배, 선배, 상사, 거래처 직원 등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좋게 말해 감정 기복이 심한 거고, 사실은 그냥 또라이다.


시골에 내려와 한동안은 감정적으로 편안했다. 큰 굴곡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도 내 말에 토를 달거나 틀렸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다들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으니까. 나와 돈으로, 일로 얽힌 사람은 없었으니까. 엄마만 빼고.


그렇다.

엄마가 있었다.


가게가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나의 감정 기복도 심해지기 시작했다. 손님에게 온통 집중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풀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그걸 왜 거기다 놔?"

"그냥 안 된다고 하면 되지, 왜 그걸 듣고 있어?"

"나 뭐 할 때는 일 좀 시키지 마."


시골에 내려온 지 여섯 달 만에 또라이가 컴백했다. 그런데 엄마 눈치가 또 백 단인 게라. 엄마는 웃으며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그럼 난 비쭉 나온 입으로 짐을 싸 쿨하게 버스를 탔다. 또라이에게 뭐라고 하면 더 미칠까 봐 엄마 속은 부글부글 끓었겠지? 나를 겪어낸 상사와 거래처 사람들에게 하루에도 열 번씩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었겠지? 또라이의 감정 기복 때문에 화가 난 어느 밤에는 신에게 기도도 했겠지?


'신이시여, 이 꼴통이 정녕 제가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고 있었던 그 작고 귀여운 아이란 말입니까?"


언젠가는 나의 더 나쁜 감정이 온갖 불만의 가면을 쓰고 저녁 밥상에서 터졌다. 회사 다닐 땐 가만 두면 알아서 감정 회복이 됐는데, 엄마 앞이라 그런지 감정이 분출했다. 밥상에는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점점 언성이 높아지자, 방에 있던 아빠가 나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게 다 불만이면 서울로 가. 가서 니 일 해. 너 알아서 잘 살면 되지, 여기 와서 뭐 하는 거야?"


아빠는 자식들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사람이다. 내가 맨날 술을 마시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와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빠가 화를 내니, 충격이 몇 배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밥을 먹다 말고 방에 들어왔다. 엄마 돕는다고 내려와서 효녀 코스프레하며 부모님을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내 눈치만 보며 쉬쉬했던 것 같았다. 사춘기 여학생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엄청난 후회들이 밀려왔다.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빠의 정자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을 울었다.  방문을 열어본 엄마는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말했다.



"진짜 서울 갈 건 아니지? 여기서 포기하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렇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각자의 룰대로 사는 것이 인생이거늘, 사회생활 몇 년 한 것 가지고 온 세상을 호령할 줄 알았던 것이다. 예민한 사람의 감정 기복이라기보다, 나의 못난 마음이 이해에 앞서 분노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이후로도 가끔 나쁜 기분이 더 나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땐 반야심경을 듣거나,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는다. 나쁜 기분은 나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허허, 곧 득도하는 거 아님??) 그래서인지 어지간해서 폭발은 안 한다. 집에서도, 가게에서도 되도록 조용히 지낸다. 아빠, 엄마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다. 정 맞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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