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안나 Jul 06. 2017

정식이 아저씨가 지나간다

점심 장사를 마치고, 설거지로 젖은 앞섶을 말리느라 앉아 있는데 초등학교 때 수위 아저씨가 지나갔다. 낡디 낡은 서류가방을 들고, 큰 키가 무색하리만치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느리게 걷는 아저씨. 얼굴도 머리 스타일도 안경도 옷도 가방도, 모든 것이 이십여 년 전 그대로인 아저씨.


"어? 저 아저씨 우리 학교 수위였는데."

"저이 별명이 뭔 줄 알아?"

"별명도 있어?"

"정식이야, 정식이."     


손님 없는 날이면 시간을 죽이느라 가게에 앉아 창밖을 본다. 그러다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엄마는 밝게 손을 흔든다. 멍하니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보던 엄마가 뭔가 떠오르면 야사 같은 것을 들려주기도 하는데, 그게 또 재미지다. 저이가 누구랑 정분이 났다더라, 남편한테 그렇게 맞고 살았는데 그 남편이 자다 죽었다더라, 저리 순해 보여도 시어머니가 너무 화나게 해서 한 대 날렸다더라. 엄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보면, 이 동네가 아수라판인가 싶다. 막장드라마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야사만 즐기는 건 아니다. 버스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지나가는 아이들, 급하게 달려와 버스를 타는 사람들, 이 동네에 처음 온 듯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람들.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종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걸 보고 있으면 그 사람만의 라이프스타일이 보이기도 한다. 직장생활이랄 게 없는 동네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라이프스타일대로 사는 듯하다.       


“왜 정식이야?”

"저 앞에 있는 밭이 저이 껀데 밭 갈 때 줄을 대고 똑바로 갈아. 앞에 있는 화단도 키 맞춰서 똑바르게 자르고. 아주 바를 '정' 자처럼 일한다니까."

"누가 지었는지 잘도 지었네."

"어. 일도 종일 걸리는데, 빠르진 않고. 엄청 꼼꼼해."

"정신 수련이라도 하나 보지."

"답답하지도 않나. 어지간해."     

    

아저씨의 밭은 우리 가게 맞은편이기도 하고 초등학교 뒤편이기도 하다.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 뒤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정식이 아저씨는 수위일 때도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어딘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여하튼 그 밭에는 이름 모를 작물들이 많이도 심겨 있다. 여러 가지 작물의 새싹들이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 너무 귀여워 웃게 된다. 정식이 아저씨가 밀짚모자를 쓰고 밭에 나와 일하는 모습이 포착되면 넋 놓고 구경하게 된다. 정말 느릿느릿 한참을 쉬지도 않고 일한다.     


"올맥도널할아버지다!!!"     


요즘, 농부에 푹 빠진 조카가 정식이 아저씨에게 '올맥도널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왜 그 노래 있지 않나? "Old macdonald had a farm. 이야이야오~"(나는 번안곡을 부르며 자랐는데 "김첨지네 밭 있어, 이야이야오~"였던 것 같다.) 그렇게 조카와 정식이 아저씨 밭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며 한참을 구경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경건해진다. 정성껏 작물을 가꾸는 농부의 마음이 전해진달까.     


저녁을 먹다 동생에게 정식이 아저씨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동생이 정식이 아저씨 이야기 하나를 해주었다.    

 

"그 아저씨 가방 있잖아. 거기에 고등학교 때 쓰던 이름표 붙여두셨어."

"고등학교 때 껀지 어떻게 알고?"

"옛날 영화 같은 거 보면 학생들이 가방 같은 데 이름표 달고 다니고 하잖아. 그거랑 똑같이 생겼어."

"오, 별 걸 다 봤네."     


정식이 아저씨에게 나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밥을 먹으며 정식이 아저씨는 스타일도 잘 안 바뀌고, 밭도 너무 정갈하게 관리하고, 잘 늙지도 않는 걸 보니, 자기 물건을 매우 소중히 하는 사람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소중한 정식이 아저씨도 씻기 싫어 빈둥대고,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보며 시간을 죽일까. 정식이 아저씨는 칸트처럼 매분, 매초를 철저하게 지키며 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