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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Jun 30. 2017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마트에 장 보러 가다 중학교 때 과학 선생님과 마주쳤다.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매년 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학교의 선생님이 십여 년 전 학생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인사를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와 함께 마트를 향해 걸었다.


며칠 후 선생님과 또 마주쳤다. 선생님의 집은 우리 가게 뒤편이었고, 선생님은 이제 선생님이 아닌 백수였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트에 가야 했으니, 우리가 마주칠 가능성은 생각보다 높았다. 이렇게 마주칠 때마다 아는 척하기도 모른 척하기도 곤란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인사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어, 그래!!!"


바삐 갈 곳도 없으면서, 고작해야 나보다 몇 걸음 앞서 마트에 갈 거면서, 습관처럼 바쁘게 걷던 선생님은 한 손으로 경례의 제스처를 취하며 날 슥 보고는 지나갔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몇 회 졸업생인지, 이름이 뭔지 따위는 묻지도 않고. 학교 때나 지금이나 영혼 없이 학생들을 대하는 건 여전하군, 이라고 생각하며 선생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느 날엔가, 저녁 무렵 마트에서 맥주와 방울토마토를 사 계산을 하다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은 캐셔가 금액을 외쳐주길 기다리고 있었고, 계산대에는 맥주가 열 병 정도 놓여 있었다. 집에 손님이 왔을 거라고, 딸네 식구들이 왔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맥주를 보며 선생님이 참 외롭고 쓸쓸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이 쓸쓸하고도 조급하고도 창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선생님, 맥주 한잔 하실래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한 오지랖이지 싶었다. 외롭고 쓸쓸한 건 참 안 된 일이지만, 선생이랍시고 교과서만 줄줄 읽어대며 툭하면 소고채로 아이들 손바닥을 때리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던 사람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지는 않았다. 마주 앉아 웃으며 곱씹을 추억 따위도 없으니까 맥주는 각자 집에서 마시는 걸로. 십 년 전 일인데 나도 참 속도 좁다.


그날 이후로 선생님과 마주치면 친근감이 느껴져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외롭고 쓸쓸해 맥주를 마신다고 생각하니 정이 갔다. 나를 알아보든, 못 알아보든, 중요치 않았다. 그저, 동네 사람으로서 인사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선생님의 외출길에 내가 알은척을 해주면 언젠가는 나를 동네에 사는 사람쯤으로 여겨주겠지. 스승과 제자는 아니더라도 마트 친구 정도는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선생님은 인사를 할 때마다 낯선 눈빛으로 나를 본다. 너는 이 동네에서 처음 보는 아이네, 하는 눈빛. 좀 더 말을 걸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 눈빛 앞에 서면 난 바쁘게 앞서 걷고 만다. (곧 선생님에게 추월당하지만.)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듯한 집에 살며, 하루에 한 번 마트만 오가는 선생님은 어떤 인생을 살았던 걸까. 왜 영혼 없는 선생님이 된 걸까. 사연팔이를 즐기는 나로서는 선생님의 사연이 알고 싶었다.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는 선생님이 좀머 씨처럼 보여 뒤를 밟아볼까 생각도 했다. 궁금했다. 너무나도 궁금했다. 다가가 몇 마디 건네면 선생님도 좀머 씨처럼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어쩐지 조금 멋진 것 같다. 현실 속의 좀머 씨를 만나 이야기하다니. 그런데 상상과 달리, 선생님이 나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말들을 지치지 않고, 만날 때마다 쏟아낸다면. 아, 때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가게에서 나와 선생님의 몇 발짝 뒤에서 걸을 때면, 인사는 애저녁에 포기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외로움이나 쓸쓸함 같은 것들을. 선생님의 뒤통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음표를 던지기 위해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오늘도 저리 바쁘게 걷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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