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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Jun 27. 2017

조카 바보는 아닙니다만

동물의 세계에는 서열이라는 것이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정한 기준에 따라 순서대로 늘어섬. 또는 그 순서." 직장생활이 그렇듯 평안한 가정생활(한집생활이라고 해도 좋겠다)을 위해서는 서열이 필요하다. 우리집에서 나의 서열은 몇 번째 정도 되려나? 아빠와 엄마 다음 정도?? 하지만 귀여운 조카는 매일 새벽같이 나를 찾아와 부스스한 면전에 대고 말한다.


"맴매! 맴매! 산타 할아버지가 안 된다고 했지?"

"네."


뭐가 안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러마고 답한다. 안 그러면 진짜 맴매다. 안타깝게도 이 집에서 나의 서열은 조카 아래인 듯하다. 하지만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가족에 비해 체력이 조금 낫다는 이유로 조카 셔틀을 도맡아 했고, 도시나 외국에 갔다 돌아올 때면 조카의 선물도 준비했다. (선물 없으면 아빠가 은근히 눈치 주고 그런다, 훌쩍.)


조카가 버르장머리 없는 것일까? 아니, 아니, 고놈이 다른 어른들은 살뜰히 챙기는 게라. 네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모든 음식 앞에서는 점잖게 "할아버지, 좀 드세요." 하며 할아버지 입속에 음식을 쏘옥 넣는다. 직장생활만 하던 아빠가 일을 쉬게 되면서 가족들에게 적응하기 위해 적잖이 노력한 시간과 무색하게 가족들은 아빠에게 잔소리 일색이었는데, 손주라는 천사가 나타나 어른으로서 존중받는 새 삶을 열어준 것이다. 흠흠, 그건 그렇고. 다음은 할머니에게 음식을 쏘옥. 다음은 엄마에게 음식을 쏘옥. 아빠는 출근했으니 다음은 내 차례다.


"음, 맛있다."

"나는 왜 안 줘?"

"이모는 안 돼!!!"


그래, 이모는 안 된다. 뭐가 됐든 안 되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내가 서열에서 밀린 이유. 물론, 조카보다 서열이 위일 필요는 없다. 왕년에 같이 사는 고양이들 서열 싸움 구경하다 고양이한테 맞은 적도 있는 사람이다, 내가. 그래도 궁금했다.


다음은 내 나름 몇 가지를 추리해본 결과다.    


첫째, 셔틀 업무에 너무 충실했다. 차가 슝슝 다니는 도로에서 조카가 뛰쳐나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일 것 같아 조카를 안고 목적지까지 가곤 했다. 이 일이 반복되다 보니 조카의 머릿속에 '이모=셔틀'이라는 공식이 입력된 듯하다. 걷기 싫고 피곤하면 "이모"를 외쳤다. 오해하지 말자, 나를 찾는 게 아니라 '셔틀'을 찾는 거다.


둘째, 상황극에 너무 충실했다. 조카가 그림책이나 만화 속 이야기에 집중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극이 자주 벌어졌다. 조카가 산타 할아버지인 척하면 나는 번개같이 루돌프가 되어야 했다. 조카가 형인 척하면 나는 동생인 척해야 했고. 조카가 산타 할아버지, 형 같은 나름 서열 높은 인물들을 맡다 보니 나는 자연적 서열 낮은 인물을 맡게 됐다. 조카가 산타 할아버지가 된다고 내가 산타 할머니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럼 조카는 대답 없이 떠났고, 우리의 상황극은 이어지지 못했다. 재미있는 상황극을 계속하기 위해서 나는 계속 루돌프와 동생이 돼야 한다.


셋째,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다. 무릇 어른이란, 한창 성장기인 아이에게 음식을 양보하기도 하고, 좋은 볼거리나 읽을거리를 양보하기도 해야 하거늘, 난 너무 내 입만 챙겼다. 맛있는 과자도 조카가 하나 먹는 동안 난 열, 스물을 먹는다. 작은 손으로 과자 한 조각을 작은 입에 넣는 동안, 나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자비 따윈 없다. 그림책도 재밌으면 내가 먼저 읽는다. 만화도 내 위주로 본다. 가끔 동생이 지켜보다 한숨을 쉬기도 한다.


넷째, 만날 드러누워 입으로만 떠든다. 새벽형 가족들이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떠나고 나면, 나는 술이 덜 깨 부스스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나온다. 거실에서 왁작왁작 떠들던 가족들은 날 한 번 보고는 각자의 자리에 충실한다. 드라마에나 나오는 아침 인사 같은 것은 없다. (욕 안 먹으면 다행이다.) 그럼 난 물을 마시고 과자를 먹다 누워서 텔레비전을 본다. 이 모든 걸 조카가 지켜보다 말한다. "이모는 아기야?" "응. 응애! 응애!"


그 밖에도 하나를 꼽으라면 장난이 심하다는 것. 회사에 다닐 땐 후배들 놀리는 재미가 있었는데, 후배들이 사라지니 그 자리에 조카가 남더라. 뭐, 어째. 내가 살려면 놀려야지. "수리수리마하수리"를 외치고 "에네르기"를 외치는 조카 앞에서도 난 굴하지 않는다. 절대 쓰러지면 안 된다.


서열에서 밀렸지만, 서운한 건 아니다. 속 없는 절친 하나를 얻었으니까. 시골생활에 이보다 큰 활력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조카를 기다린다. 어떤 역할을 맡게 될까, 뭘로 놀리나, 어떤 음식을 나눠 먹을까,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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