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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Jul 12. 2017

주사와 주정 사이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야?"

"술을 마셔."

"여기서 더 마셔?"

"술만 마시지 말고 적당한 타이밍에 정신을 살짝 놓고 다리를 확 걸어."

"확? 그게 뭐야? 어떻게 걸어?"

"멍충아, 술이나 마셔."


술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마셨다. (남부끄러울 정도로 마셨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 정신이라는 게 무섭더라. 누군가 끈적한 추파를 보내며 다가온다 싶으면 정신이 번쩍 났으니까. 정신이 보이기라도 하는 거라면 이 악물고 꼬집기라도 했을 텐데. 그 와중에 눈치까지 없어서 수많은 커플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도 모르고 술만 열심히 마셨다.


연애 세포가 건강하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며 아저씨들에게 희롱 비슷하게 정신 몇 번 털린 후로는 그마저도 죽어버린 것 같지만. 아니다. 이건 그냥 핑계다. 사실, 다른 사람과 친밀해진다는 것이 귀찮고 싫었다. 일만 하고 살기에도 내 삶은 충분히 바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끔 정신이 들면 소개팅을 했다. 어쩌면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는 시도만으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을 씻어버리려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소개팅 자리에서는 열심히 임했다, 남들처럼. 문제가 있다면 소개팅이 거듭될수록 술친구만 는다는 것. 애프터 없는 술친구. 내 마음의 술친구.


그렇게 소개팅도 시들, 일도 시들해진 후로는 그냥 혼자 재미나게 놀았다. 공연도 보고,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이랑 밤새 놀고 하면서. 나이가 들었으니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무 따위는 딱히 없었다. 시골에 내려와 동생과 친구들이 결혼 생활하는 걸 보기 전까지는.


시골에 와 부모님 집에 살게 됐는데, 이상하게 그 집이 더 이상 내 집 같지 않았다. 동생은 자기 가족을 꾸렸고, 아빠와 엄마는 가족이고, 친구들도 다 가족이 있는데... 그러면 나는? 음... 외로움이라든가, 질투라든가 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나도 내 가족이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두둥! 그래서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가져볼까 하고 주변을 살폈다. 주정뱅이 1, 주정뱅이 2, 주정뱅이 3... 남은 사람들도 나랑 다를 게 없구나. 누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그냥 그렇게 혼자 사는 건가? 결혼한 친구들은 주변에 괜찮은 동창을 이리저리 엮어주려고 눈이 벌갰다. 내가 술만 취했다 싶으면, 마구 도발했다.


"OO이 어때?"

"생각 안 해봤는데."

"만나 봐."

"별로..."

"야,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으면 시도를 해야지. 걔한테 영화나 보자고 해."

"... 그럴까? 번호가 있나?"


아, 입이 방정이고, 술이 화근이다. 순해 빠진 동창에게 전화를 해 내일 영화를 보자고 말했다. 다음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회사 반차 냈는데 어디로 가면 되냐고.


"어??? 왜 오는데???"


급하게 통화 목록을 뒤졌다. 미안하게도 난 지난밤의 기억을 지우고 말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 것이었던 것이다. ;;; 일단 뱉은 말이라 책임은 져야 했기에 가게 앞으로 오라고 해 영화를 봤다. 그리고 밥을 먹었다. 결정장애인 친구의 차로 시내를 네 바퀴는 돈 뒤에야 겨우 삼겹살을 먹을 수 있었고, 그날의 삼겹살은 흡사 고무를 씹는 것 같았다.


삼겹살을 배가 부를 때까지 씹은 후에야 깨달았다. 그냥 한 번 만나보는 것도 이제는 어렵게 됐구나. 나름 깔끔하게 헤어지고 집에 와 이불 킥을 날리다 잠이 들었다. 전날 그렇게 전화하지 말았어야 했다. 책임감이랍시고 영화까지 보지 말았어야 했다.


어쩐 일인지 그 이후로 순해 빠진 친구와 술을 마시다 그 친구가 만취만 했다 하면 영화를 보자고 한다. 별 희한한 술버릇 다 봤다. "저기요, 저는 정신 멀쩡하고요. 친구랑 영화 보는 거면 괜찮지만, 남자로는 조금 아닌 것 같은데요." 푸하. 쥐뿔도 없으면서, 이제 곧 마흔이면서, 도도하게 이런 말이나 하고 앉아 있다. 걔나 나나 정신을 놓긴 했는데, 맥락상 이렇게 정신을 놓으라는 건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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