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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Aug 18. 2017

지금은 마감 캠프 중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마감하고 답답해서 무작정 제주도 왔는데, 숙소들이 다 예약이 찼다네요."

"지금 어딘데요?"

"제주공항에 있어요. 희원 씨랑."

"네??? 언제 가시는데요?"

"몰라요. 마감하고 욱해서 오는 티켓만 끊었어요. 근데 갈 데가 없어, 허허."

"그, 그럼... 저희 집으로 오실래요?"

"오, 정말요? 우린 고맙지. 지금 가도 돼요?"


마감하다 엄청 엄청 놀고 싶어 제주도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제주도도 아니면서 제주도인 척 사기를 쳤다. 마치 진짜 제주도인양, 전화 받던 친구가 깜빡 속아 넘어가 스트레칭하던 몸을 일으켜 세워 방문을 박차고 나올 때까지. 그래도 우울한 기분은 가시질 않는다. 오랜만에 서울까지 왔는데 이게 뭐냐, 이게.


"편의점 갈 건데."

"같이 갈까요?"

"네. 잠 좀 깨고 와요, 우리."


이것은 장난전화로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하느라 이틀 동안 밤샌 자들이, 자정 무렵 몰려오는 잠을 떨치려 몸부림치는 소리다. 시골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지만, 책임 편집의 경우 작업물 마감은 서울에 와서 직접 하기도 한다. 디자이너 사무실에서, 디자이너와 오붓하게. 주말 사이에 일을 최대한 마치고 장사에 지장 없게 내려가려면, 이삼 일 밤새는 건 당연해진다. (나는 그렇다 치지만, 디자이너는 무슨 죄인가. 따지자면 할 말 없다, 흠.)


서울에 올라오기 전, 작업한 원고 뭉치를 배낭에 챙겨 넣으며 생각했다. 오랜만에 서울에 가니까 전에 다니던 회사에도 가보고, 못 본 친구들 만나서 외쿡 음식도 먹어야지. 마감 일찍 마치고 도시의 밤을 즐겨야지. 아하! 영화 보는 것도 잊지 말자.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듯 시궁창.


디자이너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스타일 바꿔보겠다며 큰 맘먹고 산 외출용 치마부터 꺼내 옷걸이에 걸어두었는데, 저것은 자린고비의 굴비도 아닌 것이 왜 입질 못하는 게냐. 디자이너 사무실에 와 작업용 추리닝으로 바꿔 입은 지 마흔여덟 시간. 잠이 올 때, 샤워 한 번씩 하고 속옷만 겨우 갈아입으니 가방 가득 싸온 외출복은 꺼낼 일이 없다. 야무지게 소설책 한 권과 시집 한 권도 챙겨 왔는데, 당최 쓸데가 없는 야무짐이다.


"종일 비가 와서 그런지 시원하네."

"그러게요. 이젠 추워요."

"비가 와도 사람들은 술을 마시네요."

"내일 쉬는 날이잖아요."


내일은 광복절. 광복의 기쁨을 아침 일찍 만끽하고 나가 놀아야 하는데. 얼마 만에 온 서울인데, 서울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건 늦은 밤에도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다는 것과 밤새도록 골목을 밝혀주는 편의점이 있다는 것. 편의점 안을 몇 바퀴 돌고 난 뒤, 디자이너와 핫식스를 사 마시며, 손에는 하리보가 든 봉지를 들고 살방살방 시원해진 밤거리를 걷는다. 사무실이 코앞에 있지만, 다른 골목으로 좀 더 먼 골목으로 돌아서 돌아서 사무실까지 걷는다.


광복절 다음날 아침에는 시골집 식당에 있어야 한다. 예약을 받고 점심 손님을 맞아야 한다. 시간이 없다. 잘 시간이 없다. 없는 정신에 파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밤새 디자이너와 작업물을 확인하고, 수정하고, 아침 무렵이면 본사에 컨펌을 부탁한다. 수정사항이 오면 또 작업을 해서 저자에게 보낸다. 그리고 컨펌을 기다리고 또 수정한다.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그제인지, 내일이 오늘인지 모를 지경이 될 때까지, 열심히.


그래도 디자이너 사무실에 있으니,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도시의 밤거리가 나를 기다리지만, 조용한 사무실에서 일거리를 붙들고 밤을 지새우는 게 얼마만인지 반갑기도 하다. (그래. 서울 살 때도 사무실에 콕 박혀 지냈는데, 새삼 무슨 욕심이냐.) 인공눈물을 눈에 넣으며, 캡슐커피를 내려 마시며 직장인 느낌을 한껏 즐긴다.


"지겹다, 지겨워."

"벌써 일어나셨어요?"

"일어나지 마요. 수고했어요."

"네, 조심히 가세요."


겨우 일정 안에 마감을 하고, 두어 시간 눈 붙이고 일어나 배낭을 챙겼다. 서울의 밤거리는 만끽하지 못했지만, 직장인 시절의 마감 캠프는 확실히 만끽한 3박 4일이었다. 모든 정신을 쏟아부었으니, 몇 개월은 서울 생각, 직장생활 생각 안 하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식당으로 돌아가 예약을 받자. 조용한 서울의 새벽을 지나 많은 직장인들이, 일에 영혼까지 털린 직장인들이 밥을 달라며 좀비처럼 달려오는 그곳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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