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부터 가게에 저녁 손님이 늘었다. 옆 동네에 무슨 공사를 시작했는데, 일하러 온 사람들이 이 근처에까지 집을 얻었단다. 직장인 위주로 점심 장사를 하며 저녁 일곱 시면 퇴근을 하던 엄마는, 퇴근 시간에 손님을 맞는 일이 잦아졌다. 프리랜서로 일하느라 점심 장사만 돕던 나도 저녁 장사를 돕게 되었고.
공사 현장에서 종일 일하다 온 손님들은 점심 손님보다 밥을 많이 먹는다. 보글보글 찌개에 따끈한 밥 한 공기를 주면, 돌아서기가 무섭게 밥을 더 달라고 한다. 식사량은 개인마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공깃밥 추가분에 대한 값은 받지 않는다. 찌개나 요리를 더 줄 수는 없지만, 요구에 따라 밥이나 반찬은 당연하게 더 준다. 어차피 남아봐야 버리기밖에 더하겠는가.
최근 자주 오는 손님 가운데 한 분은 밥을 평균 세 공기 정도 먹는다. 우리는 식당용 스테인리스 밥그릇 대신, 가정용 사기 밥그릇을 쓴다. 사이즈도 물론 더 크다. 큰 공기에 가득 담긴 밥을 손님들이 두세 공기씩 먹으면, 어떤 날은 밥이 중간에 동나기도 한다. 그럼 엄마는 압력밥솥에 불을 올려놓고 밥을 얻으러 앞 식당으로 간다. 이 날은 자주 오는 손님에게 얻어온 밥마저 다 털어주고 난 후였다.
"계산해주세요."
"어? 지금 밥 하고 있는데. 한 공기 더 드시고 가세요."
"아이고, 오늘은 기권할게요."
"새 밥이라 맛있을 텐데."
농담이나 비아냥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새 밥을 드리고 싶었다. 다른 집 밥 말고, 따끈따끈하고 달큼한 우리집 새 밥을. 그래서인지 손님도 기분 나쁘지 않게 농담을 받아넘기고는 돌아서 나갔다.
어릴 때부터 현장직, 일명 노가다꾼을 마주치면 희한하게도 울컥하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우리 아빠가 바로 그 노가다꾼이었기 때문일까. 꼭두새벽에 나가 밤늦도록 일하다 새벽쯤에야 술 취한 채 뚜벅뚜벅 비틀거리며 초인종을 누르던 아빠. 땀 냄새 가득한 작업복과 안전화를 벗으며 큰 숨을 쉬던 아빠. 주말도, 공휴일도, 여름휴가도 없이 일하던 아빠.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는 특수 용접을 하던 기술자였고, 품질 관리를 하던 QC라 거래처 접대를 하느라 땀 흘리며 술을 마셨던 건데. 어린 마음에 나는 우리를 위해 종일 힘들게 일하고, 술까지 마시는 아빠가 안쓰러워 초인종 소리가 울리면 괜히 미안하고 그랬다. 그래서 술에 취해 과자를 몇 봉지씩 사와 나를 깨우며 먹으라고 하면 세 개고 네 개고 열심히 먹다, 배탈이 나기도 했다. (하하, 나 효녀??)
"여긴 언제 쉬어요?"
"일요일이랑 공휴일은 쉬어요."
"그럼 내일은 다른 데서 밥 먹어야겠네."
"일요일에도 일하시나 봐요."
"우린 일요일이고, 공휴일이고 없어요."
괜히 또 미안하고, 짠하다. 그러다 생각했다. 이 분들은 거의 대부분 월급보다는 일당을 받는다. 이렇게 지방까지 내려와 방을 얻어놓고 일할 정도면 일당도 적지 않단 얘기다. 잘은 모르지만, 일당이 제일 센 건 용접, 그다음은 전기라고 들었다. 그 중간 어디쯤에 석공이 있는 것 같고. 이들의 하루 일당은 적어도 20만 원 이상. 주말에, 공휴일에 쉬는 것도 좋지만, 본가가 먼 사람들은 월세 까먹어가며 식구도 없는 방에서 혼자 쉬느니, 일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본가로 돌아가는 게 이득이리라.
흠흠. 종일 땀 흘려 일하고 그 대가를 받아가는 사람들을 왜 내 마음대로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겼을까? 어디 가도 밥 굶지 않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들인데. 마음 밑바닥에 공부를 안 해서, 돈이 없어서 저런 힘든 직업을 가진 거라는 허튼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들은 나를 안타깝게 느낄 수도 있는데.
밥 한 끼 주면서 별 생각을 다 한다. 밥이나 떨어뜨리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