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안나 Aug 29. 2017

나를 비우는 시간

오늘은 월요일. 일상적인 패턴으로는 가게에 있어야 하지만, 집에 일이 있어 식구들은 모두 아침 일찍 외출하고 나만 집에 남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빈둥거리며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한참 보다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셨다. 음, 뭘 먹을까.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국 아침으로 라면을 먹을 테니.


라디오를 틀어놓고 후루루 짭짭 라면을 먹는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혼자라 그런지 라면이 엄청 맛있다. 좀 더 집중하고 싶어 라디오를 껐다. 고요한 집에 후루룩거리는 소리만 퍼져나간다.


"여보세요."

"언니, 뭐해?"

"라면 먹어."

"혼자 심심할 텐데 놀러 올래?"

"아니, 절대 아니."

"하하하. 알겠어. 나도 안 갈게."

"좋은 생각이야."

"응. 쉬어."


오예! 눈치 빠른 동생이 이럴 땐 센스까지 있다. 라면을 마저 먹고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하고 소파에 누웠다. 하루키 신작 소설이나 읽어볼까, 싶어 책을 펼쳤다. 두세 페이지도 채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책이나 읽기엔 시간이 좀 아깝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창문을 다 열고 청소기를 돌렸다. 옷장 위에 곱게 올려진 옷들도 옷장에 넣었다. 더워서 샤워를 했다.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개 될까. 뚜뚜룹 뚜루 뚜루루루룹!"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샤워를 하며 생각 나는 노래에 아무렇게나 가사를 붙여 불렀다. 아무도 없으니 좋군, 하고 생각하면서. 샤워를 마치고는 맨몸으로 속옷을 입으러 방까지 갔다.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서.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고, 화장품을 바르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럼 이제 뭘 할까. 또다시 하루키의 소설을 펼쳤다. 하루키의 소설에 감탄하던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고 하면 읽게 된다. 열심히. 그런데 이번 소설은 집중이 잘 안 되네. 지루하고. 내가 늙는 건가, 하루키가 늙는 건가. 소설을 읽기보다는 소설을 매개로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이번 달 들어 한 3주 동안, 두 권의 편집 마감을 했다. 그중 열정을 불사른 한 권 때문에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였다. 회사에 다닐 때라면 마감통(내가 아는 대개의 편집자는 책을 마감하면 아프다. 머리가 아프거나, 소화기관이 아프거나, 몸살이 나거나 하는 식이다. 그래서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한다. 우리끼리는 이를 '마감통'이라 부른다.)을 핑계로 하루 정도 결근을 하고 홀로 집에서 푹 쉴 텐데, 지금은 가게에 계속 일이 있고, 집에 식구들이 있어 온전히 쉬기란 쉽지 않다. 외주 주제에 마감통이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하는 마음도 조금 있고.


여하튼 폭발 직전에 종일 집에 혼자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음 한 일주일 제주도에 다녀와야 했을 수도 있는데. (이 편이 더 낫긴 하지, 흠.) 그렇게 소파에 누워 별 의미도 없는 독서를 하고 있자니,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들으나마나 술이지 뭐. 다른 때 같았으면 쪼르륵 달려 나갔겠지만, 오늘은 집에 혼자 있으니 그럴 수가 없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렇게 쉽게 날릴 순 없지. 저녁까지 철저하게 즐겨주겠어.


커피가 너무나 마시고 싶었지만, 외출하지 않았다. 책을 읽다 자다 일어나 다시 책을 읽었다. 소파에 가만히 누워 흘러가는 시간을 감상했다. 가끔은 이렇게 나를 비워줘야 하는데 그동안 이걸 얼마나 안 한 걸까, 생각했다. 시골에 내려와 거의 2년 동안, 종일 동동거리거나 자책하다 술에 취해 잠드는 날이 많았다. 식구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가질 마음이 없었는지도.


식구들과 함께 있으니, 나를 돌아볼 시간은 많았지만 나를 비워낼 시간은 없었다. 외부의 사람으로부터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을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소화시키기에 바빴다. 에너지 반사를 해놓고 나를 오롯이 지켜보고 비워내지 못해 혼자 시간 쓰는 법도 잊고 말았다.   


해 질 녘이 되어 식구들이 돌아왔다. 동생과 조카도 왔다. 나는 아직 소파에 누워 나를 비워내는 중인데, 식구들의 대화 소리가 꽤 컸다. 조금 더 이 시간을 즐기고 싶어 책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할까. 당분간은 이 집에서 나가기 힘들 테니 이 집에서 혼자가 되는 법을 찾아봐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아메리카노를 원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