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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Sep 02. 2017

친구의 부모님을 만났을 때

마스다 미리 산문집에서 본 표현법을 인용하자면, 난 12세를 3회 산 36세 미혼 여성이다. 어른들이 말하는 딱 좋을 나이에 결혼한 친구들은 벌써 애를 낳아 초등학교에 보냈으니, 이제 슬슬 어른들의 결혼 걱정을 들을 나이가 된 것이다. (결혼 걱정은 이미 진작부터 들어왔지만, 요즘처럼 많이 들어왔던 때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십여 년 만에 고향에 내려와 지내다 보니 친구들의 부모님을 자주 만난다. 마트에서, 길에서, 친구 집에서, 우리 가게에서, 친구 가게에서... 늘 함박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시지만, 곧이어 나오는 말들은 대부분이 짐작하듯 결혼 얘기. 한결같은 결혼 걱정에, 요즘은 나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게 만드는 주파수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1. 동네 마트에서

나: 안녕하세요!

친구 母: 어쩐 일이여?

나: 친구들 놀러와서 고기 사러 왔어요.

친구 母: 남자 생겼냐?

나: 아니요. 대학 때 친구랑 친구 애기들 휴가 왔어요.

친구 母: 아이고. 니 새끼들을 먹여야지. 느이 엄마는 남자 자빠뜨리는 방법도 안 알려준다니?

나: 헤헤. 몰라서 못하나요??

친구 母: 뭐... 그건 그렇지.


#2. 우리 가게에서

나: 어서 오세요.

친구 父: 야!!! 너덜은 왜 시집도 안 가냐?

나: 미경이 왔다 갔어요?

친구 父: 그려. 속 터져 죽겄다. 왜 안 가는 겨?

나: 일 잘하면 됐지, 시집까지 가야 돼요?

친구 父: 얼라? 일은 일이고 시집은 시집이지. 때가 됐는데 왜 못 가냐?

나: 미경이한테 잔소리하고 남은 거 하러 오셨어요? 허허, 전 괜찮아요.

친구 父: 괜찮긴 뭐가 괜찮냐. 어이구... 밥 줘!


#3. 길에서

친구 父: 오디 가냐?

나: 마트 가요.

친구 父: 너도 많이 늙었다.

나: 저도 사람인데 늙죠.

친구 父: 얼른얼른 가. 이제 주름 생기겄어.

나: (헐...) 네네, 가야죠.


#4. 친구 가게에서

나: 안녕하세요.

친구 母: 또 술 먹을라고 왔냐?

나: 네. 어디 갔어요?

친구 母: 바다에서 일하고 있지.

나: 언제 끝나요?

친구 母: 물러. 너덜 만나야 맨 남는 것도 없고, 안 갈켜 줄 텨.

나: 먹는 게 남는 거죠. 불러서 다녀올게요.

친구 母: 아이고, 난 인자 모르겄다. 부르든가 말든가.


#5. 친구 집에서

친구 母: 애인 있냐?

나: 아니요.

친구 母: 옴마. 왜 없댜?

나: 그러게요.

친구 母: 내 전화로다가 사진 좀 보내줘 봐.

나: 누구 소개시켜주시게요?

친구 母: 어. 즈어기 오디 남자 하나 있댜. 시커먼 놈들이랑 그만 놀러댕기고 가야지.

나: 네. 안녕히 계세요.


친구 부모님들을 만나면 웃으며 돌아서지만, 속으로는 부모님들의 걱정에 1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내용은 알은척을 위한 형식에 불과하달까. 다른 어른들이 결혼 얘기를 하면 화부터 나는데, 친구 부모님들의 결혼 걱정은 어쩐지 정겹다. 결혼한 친구 부모님이든, 결혼 안 한 친구 부모님이든 인사의 끝은 늘 결혼인데도 지긋지긋하지 않다. 나도 나이를 먹고 친구 부모님들도 나이를 먹어 아프고, 늙어서 큰소리도 못 치는 나이가 되면, 이것도 아쉽겠지 하는 마음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날 변함없이 어릴 적 꼬마로 봐주시는 분들의 걱정이기에 안심이 될 때도 있다. 모르는 사람들의 잔소리보다야 백 번 낫지, 암. (이런 걸 두고 '자기 위안'이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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