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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Apr 25. 2017

이것이야말로 커리어우먼의 삶

술이 안 깨 퉁퉁 부은 얼굴로 종일 일하다 퇴근하는 날이 계속된다. 늦게까지 일하다 퇴근하면 입맛이 없다. 사실, 뭘 먹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냉장고 사정이다. 밤 10시쯤 여섯 평도 안 되는 원룸으로 돌아와 신을 벗는다. 불 켜는 것도 잊은 채 외투도 벗지 않고 방에 가만히 눕는다. 맥주나 꺼내 마실까.      


십 분, 이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하루를 돌아본다. 낮 시간에는 전화와 메일, 외근 등으로 끝없이 누군가와 소통해야 했고,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조용한 사무실에 앉아 원고 수정에 집중했다. 상사와의 충돌에도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할 만한 연차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출간 일정이나 편집 방향, 거래처 관리, 후배 건사 등 신경 쓰고 챙겨가며 잔소리하고 항의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나름의 노하우도 생기고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보람도 느껴 회사에 몇 시간을 있든 고단하지 않다.     


아, 이것이야말로 커리어우먼의 삶인가!

이런 나의 삶이 조금은 감탄스럽기도 하다.      


결전의 순간은 불현듯 온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해 믹스 커피를 들이켜고, 전화와 메일로 급한 업무를 처리했으며, 서둘러 자료를 준비해 회의에 들어갔다. 자료에는 출간일이 미뤄진 원고에 대한 내용이 있었고, 나는 그 내용을 보고하며 이유를 줄줄이 읊었다. 그러던 중 대표가 내 말을 끊었다. 큰일이다. 얼굴빛이 어둡다. “출간일을 자꾸 미루면 어떻게 합니까? 일을 하고는 있는 겁니까? 많이 참고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더 참아줘야 하는 거예요?”     


다른 직원들도 있는데 큰소리로 무안을 주다니. 일하는 사람이 그릇도 깨는 법이라고 말하던 그 너그러운 사람은 어디로 간 건가. 시의성을 생각해 도서 출간을 서두르는 대표와 출간일을 조금 미루더라도 좀 더 꼼꼼히 책을 만들고 싶은 내가 부딪힌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중간 관리자 없이 혼자 버둥대며 책을 만들다 보니 거래처 직원을 만나며 맨땅에 헤딩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편집을 하면서 문장을 만지는 일은 저자의 생각을 만지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문장을 만질 때는 늘 조심스럽고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특성상 프로 글쟁이가 쓴 글을 만지는 게 아니다 보니 손 볼 문장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저자와 소통할 일이 많았고, 따로 직장이 있는 저자도 피드백을 빨리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이렇게 대표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의 이런 마음을 구구절절 말해봤자 쓸데없이 진지하다고 핀잔만 들을 것 같았고, 말한다 한들 회사 매출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건 내 문제였고 대표는 대표의 문제가 있었다. 좋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같았지만, 완성도나 매출 면에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책 한 권을 완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내 성향을 대표가 많이 참아준 것도 사실이었다. 사무실에 온 대표가 내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잔소리를 꾹꾹 누르며 돌아서던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없는 살림에 아등바등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쌓고 싶은 내 마음도 몰라주는 대표가 야속하기만 했다. 내 생활도 없이 회사를 위해 돈을 쓰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책을 읽는 나 자신이 대표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보람? 커리어우먼?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 의견을 말할 연차가 되었다고 자부하던 게 지난밤인데, 대표의 호통 한 마디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 할 말도 못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앉아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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