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안나 Nov 04. 2017

비야, 내려라, 비야

나는 지금 경주다. 한옥풍의 숙소에서 빈둥거리며 버거에 맥주를 마시다 컴퓨터를 켰다. 오늘, 유독 바쁜 점심 장사를 마감하고 바쁘게 경주행 버스에 탔다. 오늘이 아니면 경주에 못 올 것만 같았기에, 어디라도 가지 않으면 어디론가 튕겨나갈 것만 같았기에.


"오늘 아저씨들 간대?"

"모르겠네. 장부 정리해달라고는 했는데..."

"기왕이면 오늘 같이 가지."


몇 주 전, 종일 돌아치는 일정에 몸도 마음도 병들어갈 때쯤. 엄마에게 경주행을 권했다. 재작년엔 엄마와 부산을, 작년엔 군산을 갔는데, 올해는 어디도 가지 못했다. 벌써 11월인데. 직장생활을 하며 휴식의 중요함을 절실히 느꼈기에 일 년에 한 번, 타지로의 여행은 포기할 수 없다. 나야 마음먹으면 언제든 배낭 들쳐 매고 이틀 정도 떠날 수 있지만, 엄마는 쉽지 않다. 나몰라라 하고 가면 그만인데, 엄마는 집에 남은 아빠가 걱정이고, 동네에 사는 작은 딸이, 사위가, 손주가 걱정이고, 가게에 올 손님이 걱정이다.


경주에 엄청 가보고 싶어 하던 엄마와 상의해 한옥풍 숙소를 예약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경주 갈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공사 기간 동안 밥을 대 먹던 아저씨들 중 몇이 다른 팀과 다시 온다고. 십여 일 공사를 할 것 같은데 밥 좀 해주실 수 있겠느냐고. 이번 주 주말에 우리는 경주에 있어야 하는데, 마침 아저씨들이 온다고?


"이번 주 주말은 어렵다고 해. 내가 말할까?"

"밥 먹겠다고 온 사람들한테 그럼 안 되지. 밥을 잘 먹어야 일도 잘 되지. 며칠이나 있다 간다고."

"흠... 숙소 환불 기간이 정해져 있는데, 이제 백 퍼센트 환불은 못 받아. 위약금이 나가."


엄마와 나는 반가운 마음에 아저씨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저씨들이 떠난 가게는 참으로 허전했으니까, 적막하고 쓸쓸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냉정하게, 제가 아저씨들을 그렇게나 그리워했는데, 지금 이 타이밍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위약금 그거 별 거 아니었다. 친구들과 술 한잔 마시면 없어질 만큼의 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 그래도 엄마와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손님의 마음과 행동, 입맛을 헤아려가며 종일 동동대던 일상에서 잠시 떠나 우리가 갈 방향을 점검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인정 많은 엄마는 경주행을 포기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경주에 가야만 했다. 이상하게도 위약금이 아까웠다.


"공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아요. 내일 비 오면 집에 갔다 월요일에 공사 재개할 것 같아요."


경주에 가기로 한 건 금요일 오후. 목요일에 저녁을 먹고 나가며 아저씨들이 말했다. 비가 오면 내일 집에 갔다가 월요일에 다시 올 수도 있다고. 그때부터 엄마는 한껏 설레었다. 주말에 느긋하게 갓김치나 담거야겠다던 엄마가 급하게 김치 재료를 사 왔다. 갓과 파를 다듬어 소금에 절였다. 내일 아침에 동생을 불러 김치를 담그고 오후에 쿨하게 경주로 떠나겠다고. 하늘이 꾸물꾸물한 것이 내일 엄마랑 경주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경주 가서 밀린 일이나 하고 오자며 챙겨둔 노트북과 책들은 배낭에서 빼도 될 것 같았다.


금요일 아침. 비가 온다. 하지만 아저씨들은 가지 않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아저씨들의 노동 일정까지 씻어내지 못했다. 아침을 먹고 나가며 저녁에 장부를 정리해달라고, 내일은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는 아저씨들. 동생에게 저녁을 맡기고 나와 함께 버스를 타면 좋으련만, 아저씨들 가는 건 봐야 한다며. 내일 아침에 출발할 테니 너는 오늘 가라는 엄마.


그렇게 지금, 나는 경주에 왔고 엄마는 집에 남았다. 벌어도 벌어도 모이지 않는 돈 때문에, 손님들의 소소한 요청에 일일이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에, 바싹바싹 말라가던 엄마가 경주에 오고, 아무 생각 없이 대충 일하는 내가 집에 남았어야 했는데.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야 엄마도 살고 아빠도 살고 가게도 산다고 생각한다. 나 없이는 그 무엇도 유지할 수 없다.


"왜 벌어도 벌어도 돈이 없을까? 월말이면 번 돈보다 낼 돈이 더 많은 것 같아."

"다음 달부터는 남을 거야. 맨날 마이너스인 것 같아도 빚이 줄어드는 거니까. 그게 모으는 거지, 뭐."

"월말만 되면 기운이 빠져. 쉬지도 않고 일하는데, 무슨 팔자가 이래?"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어. 내가 쉬어야겠다 하면 쉬는 거지.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이유 대다 보면, 평생 못 쉬어. 팔자 탓이 아니야."


허겁지겁 배낭을 꾸린 후 엄마와 점심을 먹다, 또 독한 말만 내뱉고 가게를 나와 버스를 탔다. 참, 못났다. 경주에 거의 도착할 즈음, 미안한 마음에 버스 안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는다.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에게 이번 달만 버텨보자고.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내일 경주에서 바람 쐬고 오면 즐겁게 일할 에너지가 생길 거라고.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고운발 크림을 아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