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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Nov 01. 2017

고운발 크림을 아시나요

술을 본격적으로 팔지 않기에 저녁 손님이 없는 건 익숙하다. 그런데 오늘 유독 손님이 없다고 생각되는 건, 가을 저녁이기 때문이겠지.


"오늘 꽃게 좋은데 모이자."

"우리 가게로 와."

"찜통 있지?"

"응. 찾아둘게."


여섯 시가 지나 이제 그만 마감을 해볼까, 하던 찰나에 마도로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가을이라 꽃게와 대하 잡이에 여념이 없는 어부 친구. 신나게 술을 마시고 집에 가도 다음날 네 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배를 타는 마도로스 친구.


해 지면 할 일 없는 시골 동네 여기저기를 쏘삭거린 끝에, 어제 함께한 아재 넷을 소환할 수 있었다. 살짝 지겹지만, 안주가 안주이니만큼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대해야지.


"머리가 왜 그냐? 엎드려 잤냐??"

"이거 오늘 파마한 건데? 별로야?"

"우리 엄마 다니는 미용실에서 한 거 같어. 저번에 그 머리가 낫던데?"

"그러게. 탱글탱글 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좀 쎄게 말았나 봐."

"사진을 가져가서 이렇게 해달라고 했시야지. 아... 어째 그런다니?"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꽃게와 대하가 익는 동안 나의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 안주가 되었다. 맨날 깍두기 머리로 다니는 놈들이 뭘 안다고 머리 스타일 운운하는 게냐.


"고3 때 민증 만들잖아."

"어."

"그때 얘 지문이 녹아서 민증 못 만들 뻔했잖아."

"지문이 왜 녹아?"

"꽃게 철에 꽃게를 많이 만지면 등에서 나오는 독 때문에 지문이 녹아. 손바닥이 맨질맨질해지지."

"그럼 지문 인식으로 등본 뽑고 하는 것도 못해?"

"어. 우리 와이프가 가을에 그거 하러 갔다가 결국 못하고 면사무소 갔잖아."

"지문만 녹간디? 손바닥도 얇아져서 그물 잡을 때 엄청 아파."


가을이면 그물에 잡힌 꽃게를 떼느라 지겹도록 꽃게를 만져대는 친구다. 정성스레 꽃게를 다듬어 앞접시에 올려주는 친구의 손바닥을 뒤집어보니, 지문이 없다. 지문 없이 얇아질 대로 얇아져 아기 피부처럼 유약해 보이는 손바닥이다. 한참 꽃게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미안해진다. 내가 꽃게 다듬을까, 했더니 자기는 친구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단다.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내가 좀 더 열심히 먹어볼게.


맛있는 안주에 시답잖은 농담 섞어 소주 몇 병 마시고 나니 시원한 아이스크림 생각이 난다. 담배 피우러 나가는 친구에게 옆집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당부했다. 눈치도 없고 심부름도 싫어해서 제일 맛없는 아이스크림을 사 올 게 분명하지만, 알딸딸한 얼굴로 동네 밤거리를 누비는 노처녀라는 이미지만은 피하고 싶다.


"아, 겁나 추워."

"아이스크림 뭐 사 왔대?"

"먹을 것도 없던디? 기냥 먹어."

"어? 이건 뭐야? 고운발 크림???"

"이. 발바닥 각질엔 이게 직빵이여. 겨울 되면 애들 손바닥 두꺼워지자네."

"이건 발에 바르는 거 아니야?"

"손바닥이 발바닥 각질보다도 두꺼워서 이 정도는 발라주야 혀."


겨울이면 안 그래도 건조한데 언 손으로 그물을 당기고 손질하다 보면, 손 가죽은 발 가죽처럼 두꺼워진단다. 아닌 게 아니라 겨울에 친구들의 손바닥은 꺼칠꺼칠해 때타월 같다. 농담 삼아 두꺼운 손바닥은 사포로 밀어야 한다는 둥, 그라인더로 갈아버려야 한다는 둥, 이야기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지금 손바닥은 한껏 얇아져 있다. 고운발 크림이 이 친구 주머니에서 저 친구 주머니로, 다시 내 주머니로,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다. 꽃게 껍질을 수북이 쌓아둔 테이블 앞에 앉아 내 손보다는 니 손이 더 두껍다며 고운발 크림 돌리기를 한다.


"꽃게 남은 거에 라면이나 끓여먹고 가게."

"그려. 나 지금 안 자면 내일 아작 나."


냉장고에 있던 소주 한 짝을 다 쓸어 마셨는데 라면까지 먹고 가겠다니. 꽃게 라면이라고 하니 안 먹을 수도 없고. 호로록 맛도 모를 라면을 먹고 집으로 간다. 왜인지 내 주머니에 든 고운발 크림을 만지작거리며.


다음 날 아침, 가게에 나와 찬 물을 들이켜며 엄마에게 고운발 크림 얘기를 했다. 그런데 엄마는 웃는 게 아니라 감동을 한다. 그리 힘들게 잡은 꽃게며 대하며, 물고기를 우리집에 가져다주는 거냐고. 그 말을 듣자, 어제 아무 생각 없이 날름거리며 살만 집어먹던 손이 무안해진다. 마도로스 친구에게 바셀린 줄 테니 저녁에 밥 먹으러 오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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