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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Oct 25. 2017

주방의 승부사

"열한 시 사십 분, 열무비빔밥 넷, 제육쌈밥 둘 있어요!"

"네!"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떴고, 점심 장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예약 메뉴는 열무비빔밥과 제육쌈밥. 이들은 테이블에 앉아 밥을 비비기 전에 계란후라이를 주문한다.


"계란후라이도 주시는 거죠?"


이렇게 나오면 아니 줄 수 없다, 허허. 두어 번의 요청이 이어진 후로 이들에게 예약 전화가 오면 미리 계란후라이를 한다. 어떤 것도 요구할 필요가 없는 서비스가 진짜 서비스다, 는 자기계발서에나 적어야 하는 헛소리고, 다른 테이블 세팅 중에 계란후라이를 해주면 모든 테이블 세팅 순서가 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식사를 마친 후에 계란후라이를 내줄 순 없으니까.)


"엄마, 이 테이블 계란후라이야."

"응. 계란 네 알 가져와."


엄마가 강된장에 된장찌개, 제육볶음 준비를 마칠 때쯤 계란 다섯 알이 담긴 바구니를 스윽 내민다. 엄마는 네 알의 계란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나는 안다. 엄마는 다섯 알의 계란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쿠, 또 망했네."

"엄마는 다른 요리는 다 잘하는데, 계란후라이는 신기할 정도로 못하네."

"뭐???"

“백종원이 요리의 기본은 계란후라이라고 했는데...”

“시끄러. 접시 좀 꺼내와.”


접시를 찾는 엄마의 눈빛에 순간 찌릿함이 번졌다. 엄마는 승부욕이 대단하다. 아닌 척하지만, 옛날부터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하고야 말았다. 메뉴 개발을 할 때도 나에게 흔쾌한 표정의 오케이 사인이 날 때까지, 그 메뉴를 만들고 또 만들어  나에게 먹였다. (그래서 내가 우리 식당 메뉴를 잘 안 먹는다.)


여하튼 주방의 승부사인 엄마가 나는 무척 신기하다. 승부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내가 승부사인 엄마 배 속에서 나왔다는 게 가끔은 무척 놀랍다. 나는 그날 승부사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약간의 신기함과 장난기로 계란후라이를 찢어먹는 엄마를 도발한 것이다. 이 악 물고 계란후라이를 하는 엄마 옆에서, 낄낄거리며.


"이따 나가서 계란 열 판 사와."

"어???"

"제일 좋은 계란으로 사와."    


열 판은 농담이겠지. 점심 장사를 마치고 후련한 마음에 덜렁덜렁 계란 한 판을 사 왔다. 조금 비싼 계란으로. 어헛, 그런데 계란을 보는 엄마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나... 오늘 점심은 계란후라이인 건가.


"왜 그것만 사 왔어?"

"열 판을 누가 먹어? 나 어릴 때 아빠가 먹인 계란 때문에 계란 알레르기 있었던 거 알지?"

"......"


어린 시절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어릴 때 아빠와 엄마는 아빠의 직장 때문에 지방에 주로 있었다. 그러다 내가 열한 살 때쯤인가 아빠가 직장을 서울로 옮겼고, 그때부터 아빠와의 어색한 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아빠는 나를 닮아 술을 자주 마셨고, 술을 많이 마시면 자던 내 앞에 먹을 걸 잔뜩 펼쳐놓곤 했다. 그럼 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그 음식을 열심히 먹었다. 술에 취한 아빠가 무서워서, 아빠의 두 손이 무안할까 봐. 그러던 어느 날 삶은 계란 스무 알을 아빠와 마주 앉아 꾸역꾸역 먹다 배탈이 났고, 어쩐 일인지 몇 년 동안은 계란만 먹으면 알레르기가 생겼다.


"엄마, 뭐해?"

"계란후라이."

"뭘 그렇게 많이 해?"

"안나가 나보고 계란후라이를 못한대."

"푸하. 계란후라이 연습하는 거야?"

"노른자가 자꾸 퍼지네."


마트에 가던 동생이 가게에 들렀다. 주방에서 열심히 계란후라이를 하는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아... 나는 그만 사라지고만 싶다. 엄마, 계란후라이가 계란후라이지 잘하고 못하는 게 어디 있어,라고 이제라도 말하고 싶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무아지경. 계란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그만하고 먹자. 아까 그 계란이 이상했네."

"아니야. 이것만 다 하고."

"제발... 그거면 충분해."


진지해도 너무 진지하다. 스마트폰으로 점심을 안 먹은 친구들을 불렀다. 동생과 조카, 나와 엄마, 친구들이 가게에 모여 계란후라이에 열무비빔밥을 먹었다. 여럿이 먹어서 그런가 조금 맛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엄마는 계란후라이의 달인이 되었을까?


"아이고, 또 망쳤네, 또 망쳤어."

"에이, 이 정도면 잘한 거지. 그냥 내자."


계란후라이를 접시에 얼른 담아 홀로 가지고 나간다. 점심으로 계란후라이 다섯 개를 또 먹을 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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