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부엌에서 오도독 오도독 오이지 씹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가 아침을 먹는다.
예순일곱의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우아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식구들이 나가면 밀대로 바닥 청소를 한다. 볕 좋은 날에는 집 앞 계단에 앉아 일광욕을 한다. 조카를 위한 놀이와 학습 프로그램을 연구한다. 사회생활을 할 때와 같은 패턴으로 일어나고 잠을 자고, 식사를 한다.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딱히 없이 다 즐겨 듣는다.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으로는 '아침마당', '인간극장', '전국 노래자랑', '나는 자연인이다' 등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잘 모르겠다. 아빠가 사회생활을 하며 가족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던 사람이었다는 것밖에.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춤 좋아하던 사람. 술에 취해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찬물에 밥을 말아먹으며 엄마가 불쌍하다고 울던 사람.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헤드폰을 쓰고 오래오래 춤을 추던 사람.
아빠가 사회생활을 떠나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의 사회생활이 바빴으므로. 사실 아빠도 그다지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므로.
그래도 잘 생각해보면, 아빠는 상냥한 사람인 것 같다. 조카가 집에 오면 버선발로 달려 나가 환영의 말을 건네고, 다른 지역에서 내 친구들이 오면 나 대신 터미널로 마중을 나간다. 엄마가 가게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고생이 많았다고, 밥은 먹었느냐고 묻고는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내주고 방으로 들어간다.
"서울 가?"
"응."
"태워다 줄게."
"괜찮아. 버스 타면 돼."
"집에 차 있고, 나도 있는데 왜 버스를 타."
"알았어."
그 집 딸이 누군지 참 멋대가리 없다. 그렇다. 이것은 점심 장사를 마치고 서울 출장을 준비하는 나와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는 아빠와의 대화다. 그러니까 서울 가냐고 묻는 사람이 아빠고 버스 타고 가겠다는 사람이 딸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서울 가냐고 묻는 사람이 딸이고 버스 타고 가겠다는 사람이 아빠인 게 더 자연스러운 것도 같다.
"언제 내려와?"
"밤에."
"전화해."
"택시 타면 돼."
"무슨 택시를 타? 그 돈 나 주고 전화해."
허허. 터미널 주차장에서 내가 내리길 기다리던 아빠가 영업을 한다. 본인이 마중 나올 테니 택시비는 본인에게 달라고. 아빠는 상냥하고도 치밀한 사람인 것 같다.
처음 집에 들어와 살기로 했을 때 가장 걱정했던 건 아빠와의 관계였다. 내가 보는 아빠는 다른 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바쁜 아빠를 자주 보지 못했으니, 그저 하우스메이트 정도로 생각했달까. 하루 종일 누워서 TV나 보고,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고, 살림이 뭔지도 모르는 딸내미를 아빠가 곱게 봐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봐도 나의 생활습관은 엉망이었다. 안 그래도 아빠와는 거의 대화가 없는데, 아빠가 나를 혼내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 당장 짐을 싸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릴 때 남처럼 지내다 다 커서 같이 살려니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빠와 둘이 집에 있을 때 제일 평화롭다. 아빠는 아빠 방에, 나는 내 방에.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도 않고 소음을 만들지도 않는다. 집에 혼자 있는 것처럼, 조용히 각자의 시간을 즐긴다. 상냥하고, 치밀하며, 대화를 즐기는 아빠가 나를 불편해하는 건 아닐까.
가만 생각해보면 그건 아빠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내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누군가의 간섭을 싫어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아빠인 것 같다. 내가 아빠를 어려워하는 만큼 아빠도 날 어려워할 거라는 건, 골치 아파할 거라는 건 사실 나의 오해다.
"오늘 친구들끼리 송년회 하기로 했어."
"밴드도 부르고 그래?"
"돈이 어딨어? 노래방이나 가야지."
"에이, 시시하네. 밴드도 부르고 춤도 추고 비싼 술도 마시고 해야 송년회지."
나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술 좋아하고, 춤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던 아빠는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안다. 어쩌면 나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는 아빠를 많이 닮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