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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May 09. 2017

단무지 없는 김밥이라니요

소자본 창업 관련 책을 만드는 출판사에 다닌 적이 있다. 사장은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이었고, 우리는 매주 한 권씩 창업 관련 책을 읽고 발표하는 스터디 비슷한 것을 해야만 했다. 창업 관련 책은 주로 창업에 성공한 사람들이 쓴다. 이 저자군은 전문 필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는 뛰어나지만, 편집자들이 이 글을 잘 읽히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편집자들이 창업 관련 이론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이 이해되지 않았다. 근무 외 시간에 책을 읽고 페이퍼를 써서 발표까지 하다니. 근무 일과만으로도 벅찼던 나는 퇴근 후 친구들과 노느라 아주 가끔 책을 읽지 않았고, 페이퍼도 준비하지 않았다.      


출판사에 입사하기 전에 사장이 창업 같은 거 생각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시골에 가 작은 도서관이나 북카페를 만들어 사람들이 책과 소통하게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던 나는, 그 목표를 가감 없이 사장에게 말했다. 그때 흡족해하던 사장의 표정이란. 하지만 페이퍼를 준비해 가지 않는 일이 반복되자, 사장은 화가 났는지 한마디 했다.      


“그런 자세로 창업 같은 거 절대로 하지 마.

너 같은 사람은 장사하면 안 돼!!!”     


그때 그 사장의 말이 개업 첫날, 첫 손님을 받은 후 내 머릿속을 후려쳤다. 밥집을 운영한다는 것은 친한 친구에게 밥 한 끼 만들어 대접하는 일이 아니다. 직원들끼리 똑같은 메뉴를 만들고 또 만들어 먹으며 맛을 평가하고 잘못된 것을 시정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집에서 하던 요리도 집이 아닌 곳에서 하면 그 맛이 전혀 달라진다. 화력, 그릇, 재료, 재료량에 따라 똑같이 만든 음식이 엄청 짜지기도 하고, 엄청 싱거워지기도 하고, 심하게는 음식이 아닌 꼴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우리는 한 가지 음식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북어칼국수를 만들며 비빔국수 소면을 끓여야 하고, 믹서로 콩국물을 갈며 김밥을 싸야 한다. 하지만 개업은 했고, 손님은 들어오기 시작하니 장사를 멈출 수는 없다.      


“팥빙수 양이 너무 적고 들은 게 없네요.”

“이 집 김밥에는 원래 단무지 안 들어가요?”     


그날 우리는 손님의 불만에 고개 숙여 사과하며 팥빙수 값을 돌려줘야 했다. 단무지 빠진 김밥도 네 줄이나 팔았다. 믹서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고 콩국물을 갈아 주방 뒤 베란다는 엉망이 되었다. 주방에서는 사인이 맞지 않아 큰소리가 몇 번이나 났다.      


긴 하루가 끝났다. 직원들끼리 모여 오늘 장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개선점도 찾아야 했지만 오늘은 일단 집으로 간다. 배도 안 고프다. 옷 벗고 일단 눕는다. 나도 온갖 피로가 몰려와 원룸으로 가길 포기하고 엄마 옆에 누웠다. 엄청난 두려움과 고민들이 내 머릿속을 휘젓는다. 엄마도 잠들지 못하는 듯하다.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회사에 연락해 죽을죄를 지었으니 다시 받아달라고 사정해볼까.

서울 원룸은 아직 안 나갔으니 슬쩍 올라가볼까.      


동생도 있고 제부도 있는데 아무 도움 안 되는 내가 굳이 밥집에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한참을 뒤척이다 밖으로 나갔다. 슈퍼에 가 맥주 두 캔을 샀다.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 계단에 앉았다. 늘 마시던 맥주가 오늘은 쓰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이곳에서 몰래 마시던 맥주는 엄청 시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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