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엄마는 늘 내게 큰 산이었다
# 50년 동안 반지하에서 미싱하는 엄마.
어머니는 스무 살에 시집을 오셨다.
삼촌 넷, 고모 둘, 시어머니에 시할머니까지.
라면을 먹더라도 큰솥에 끓여야 했다.
대구광역시 서구의 비산염색단지.
어느 부동산책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로 묘사된
주인공이 살던 바로 그곳.
대구에서 가장 허름한 거기가
내가 크고 자란 곳이다.
아마도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대가족의 보금자리를 탈출한 부모님은
더 어려운 난관을 뚫어야 했다.
방하나에 미싱 공장용 작은 상가가 딸린
더 싸고 저렴한 월세를 찾아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니셨다.
덕분에 나는 동네 친구가 없다.
이사를 너무 많이 다녀서 그렇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쯤인가?
그때는 우리 반 반장이 주인인 주택에서
우리 가족이 월세를 살기도 했다.
집 없는 서러움은 이미 그때 체감했었다.
네 명이 누우면 끝. 정말 단칸방이었다.
내 나이가 40중반. 지금 생각해 보니,
스무 살이면 아직 애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근데 어머니는 그때부터 미싱을 하신 거다.
새벽부터 잠들기 전까지 미싱을 돌려야
두 아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으리라.
가끔? 아니, 이따금?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더 자주
미싱 바늘에 손톱이 뚫리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어머니는 부엌 겸 욕실로 사용하는
실내인지 야외인지 헷갈리는 그 공간에서
겨울엔 손발이 꽁꽁 얼어버리는 그곳에서
가족의 식사를 준비했었다.
미싱 바늘에 뚫린 손가락으로 말이다.
그런 어머니가 내겐 큰 산이었다.
내가 수석졸업을 한 것은 모두 어머니 덕이다.
매우 간단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는 간단한 원칙을 세웠다.
부모님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공부하고
부모님보다 조금 더 늦게까지 책을 본다.
그것이
희생하는 가족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다.
하지만 매번 어머니께서는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밥을 하셨다.
나에겐 아직도 된장찌개를 준비하며
도마에서 칼질하는 소리
보글보글 끓이는 소리
구수한 찌개의 냄새까지.
그 추억이 뇌리에 남아있다.
IMF와 금융위기 등으로
가족의 생계가 위태로울 땐
어머니께서는 아파트 입주 청소 알바도 하셨다.
내가 30대 후반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이제 40대가 되었다.
직장생활과 투자, 독서로 자발적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흘렀고
투자로 어느 정도의 수익이 생겼다.
점점 더 작고 왜소해져 가는 부모님이 보인다.
어릴 땐 너무나 큰 산이었던 엄마가
이제는 왜 이렇게 힘겨워 보일까.
부모님을 위해 29평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냉장고와 건조기, 세탁기와 에어컨,
TV와 정수기, 새 그릇과 새 이불까지…
모두모두 새것으로 마련해 드렸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작은 화장대를 구입했다.
어머니 평생의 첫 화장대.
작은 핑크색 의자도 함께 샀다.
나는 수십억 대 큰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겨우 3억 1천짜리 아파트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평화로웠고 뿌듯했다.
지난 시간 혼자 공부했던 노력의 흔적들이
조금이라도 현실화된 것에 감사했다.
더 늦기 전에 부모님들이
생전 처음으로 아파트에 들어오셨다.
젊은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생존하기 위해 악착 같이 살았던 드라마.
그 필름이 내 머릿속에서 흑백영화처럼
형상화되어 상영되었다.
20살 시골처녀의 대구 나들이.
그 한 편의 영화는
과연 해피엔딩이 되는 것일까?
나도 어머님의 마음이 궁금하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났다면
나는 얼마나 곱디곱게 키웠을까.
나는 첫째 공주딸에게 주는
사랑의 1% 만이라도
어머니에게 주고 있었던가.
다음 생에는 어머니가
내 딸로 태어났으면 싶은 생각도 든다.
학습이든 그것이 투자이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습득의 밀도는 당신의 간절함에 달려있다.
간절한 사람은 빨리 습득한다.
당신이 간절하다면 아픈 만큼 성장하리라.
당신은 왜 투자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당신의 간절함은 무엇인가?
여러분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