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바뀐 꿈은 진짜 꿈이 아닌가?
고등학교 3년 간은 학업에 충실했다. 학교, 학원, 공부 이런 기억들 뿐이라 언뜻 재미없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세히 기억해 보면 의미 있던 순간들도 있었다. 학교 과학 동아리에서 친구들과 쌓은 여러 추억과 경험, 과학 학원에서 만난 개성 넘치던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집에서 틈틈이 하던 피아노 연주가 떠오른다. 사회성 떨어지는 내가 원래라면 하지 못했을 다양한 활동들을 과학 동아리를 통해 할 수 있었고, 친구 통해 알게 된 집 근처에 숨어있던 작은 과학 학원을 통해 수능만을 위한 공부가 아닌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피아노는 초등학생 때 그만둔 후로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동생이 음악 학원에서 받아온 이루마의 May be라는 곡의 악보를 보고 곡이 너무 좋아서 다시 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장조 악보로 연습을 하다가 원곡 악보를 찾아서 연습을 하고, 공연 영상을 보며 중간에 섞인 애드리브를 따라 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공연 영상에서 여러 좋은 곡들을 더 찾을 수 있었고, 한 곡 한 곡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중엔 이루마의 여러 곡을 악보 없이 칠 수 있게 되어 꽤나 뿌듯했다. 종일 공부만 하다가 틈틈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시간이 돌이켜보면 나의 중요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아니었나 싶다.
중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에는 항상 '수학과 교수'라고 적어냈다. 수학에 관심을 갖다 보니 접하게 된 몇몇 수학 관련 서적을 통해 수학의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었고, 그 매력에 더 매료되었다. 그러던 중, 그 영화를 보고 말았다. 아이언맨 1은 어쩌면 그 시절 수많은 이과생들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준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토니 스타크가 동굴 속에서 아크 원자로를 만들고 아이언맨 수트 마크1을 만드는 장면, 수트를 개선하며 겪는 여러 시행착오들, 자비스라는 인공지능과 대화하며 함께 납땜을 하는 모습, 수트를 입고 첫 비행 테스트 때 마스크에 나타난 헤드업디스플레이 등 여러 첨단 기술들을 보며 흥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로봇을 '입는다'는 개념 자체도 신선했지만, 영화에 소개된 기술들이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마치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 더 이 영화에 끌렸던 게 아닐까 싶다.
대학 결정 당시에는 원래 꿈이던 자연대의 수학과냐, 아이언맨을 만들기 위한 공대냐의 기로에서 고민을 했다. 부모님과 논의 후 내린 결론은, 어떤 길이든 박사 학위까지 할 것을 고려하면 연구 환경이 좋은 곳으로 가자는 것이었고 그렇게 나는 울산에 있는 학교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울산으로 가기로 한 이 결정이 앞으로의 내 인생 방향을 정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전국 광역시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울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는데, 울산으로 떠나는 날 KTX 열차가 출발할 때 창 밖으로 부모님이 손 흔들어주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던 기억이 난다.
울산에서 시작된 나의 20대는 너무나 소중한 경험들로 가득했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새롭게 어울리며 지내는 것이 내 성격 상 힘든 일이었을 텐데, 다행히 학교에서 처음 만난 OT조 구성원이 다들 너무 좋아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입학 초에는 아이언맨이고 나발이고 이 낯선 사회에 적응하고 성인이 된 것을 자축하며 친구들과 부지런히 술을 마시러 다니느라 바빴다. 피시방이나 노래방처럼 담배 냄새가 나는 어두운 곳은 무서운 곳이라는 생각에 모범생처럼 살던 모습은 다행히도 어디 가지 않았는지 성적은 어느 정도 챙기면서 놀았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동아리에도 들지 못하고 주로 오티조 친구들이나 기숙사에서 친해진 몇몇 친구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주로 야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했다. 노래방의 매력도 알게 되어 친구들과 밤새 노래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 각 학과 교수님들과 그 과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행사가 있었다. 학교 특성상 1학년은 전공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2학년 전공 선택 시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준 행사였던 것 같다. 나는 아이언맨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몇몇 친구들과 기계공학과 행사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정말 운이 좋게도 아이언맨 수트와 같은 엑소스켈레톤 로봇을 연구하시는 교수님 A를 알게 되었다. 이 운명과도 같은 날을 기점으로 내 목표는 A교수님 연구실로 대학원을 가는 게 되었다. 당시 학교 학생들 대부분의 분위기가 동 대학원 석박통합과정으로 입학하는 것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학부생 때부터 연구실 경험을 쌓는 친구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꼭 대학원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졸업 요건 중에 연구 포스터 발표 같은 것이 있어서 연구실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기도 했는데, 빠른 친구들은 2학년 때부터 연구실에 들어갔고 보통은 3학년 때 연구실에 인턴 지원을 하였다. A교수님은 내가 1학년이던 당시에 첫 임용되신 신진 교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창기부터 연구실 인기가 많았다. 당시 아이언맨을 필두로 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흥행도 연구실 인기에 한몫했겠지만, 로봇이라는 게 전공 지식이 없어도 결과물이 움직이는 게 눈에 보이고 신기한 것이 인기의 비결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3학년 1학기에 연구실 인턴 지원을 하였는데, 인턴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인턴 지원서가 감명 깊었던 건지, 아니면 순전히 운이었는지는 몰라도 인턴에 합격하게 되었다. 인턴 합격 후 처음 교수님을 뵙기 위해 오피스 앞에서 설레고 긴장되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중학교 때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로 줄곧 수학과 교수가 되어 방구석에서 연필과 종이로 수학 연구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아이언맨이 나에게 새로운 꿈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여러 우연과 결정들이 겹쳐 아이언맨을 만들고자 하는 꿈에 조금은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당시까지만 보면 꿈이 일관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수학이든 아이언맨이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큰 범주의 '나만의 길'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에피소드에서 소개되겠지만, 아이언맨을 만들겠다고 찾은 기계공학과의 A교수님 연구실에서 막상 발견한 나의 적성은 아이언맨 수트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적성은 수학에 대한 내 관심과도 연관이 있다. 한 편으론 내가 아이언맨을 좋아한 것이 어릴 때 로봇 만화에 열광하던 내 모습과 어떤 연관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로봇에 대한 내 적극성은 프라모델까지였고 실제 로봇을 만들고 싶다는 꿈까지 연결되지는 않았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궁극적으로 찾고 싶은 것은 그 기억 안에 숨겨진 '나만의 길'에 대한 답이다. 과거 기억을 통해 '나만의 길'에 대한 단서를 몇 가지 찾을 수 있었지만 단서들 간의 연결 고리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보고, 적어보고, 생각해 보는 것은 분명 나를 알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