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협업은 쉽게 경험하기 힘들다
아이언맨 만들기를 꿈꾸며 시작한 연구실 인턴 생활은 꽤 재미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처음 지도교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 오피스에 찾아갔을 때 나 말고도 두 명의 인턴이 더 있었는데, 그날 교수님과 상의 후 우리 셋은 세그웨이를 만들어보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세그웨이를 만들기 전에 앞으로 사용하게 될 툴에 대해 배우고, 조금 후부터 역할 분담을 했는데 나는 세그웨이의 제어 부분을 주로 담당했다. 하드웨어 설계 관련해서는 영 재능도 흥미도 없었지만 그래도 수학에 기반한 이론 쪽으론 이해가 나쁘지 않았기에 적합한 역할 분담이었던 것 같다.
세그웨이는 제어 분야의 'hello world'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inverted pendulum문제이다. Hello world수준이라기엔 난이도가 높은가 싶기도 하지만, inverted pendulum문제가 대표적인 제어 문제 중 하나는 맞다고 생각한다. 세그웨이 컨트롤러를 만들려면 먼저 세그웨이의 다이나믹스를 모델링해야 하는데, 세그웨이의 작동 원리가 오뚝이처럼 기울면 다시 서려고 하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inverted pendulum 문제로 정의된다. 당시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다이나믹스 모델링은 원판의 바퀴 두 개와 직육면체 몸체로 세그웨이를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단순해도 멀티 바디 모델이다 보니 기존에 알던 고전 역학 방식으로 표현하려니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이 다이나믹스를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검색을 해보다가 이때 처음 Lagrangian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에너지 관점으로 다이나믹스를 표현한다는 게 신기했고, 세그웨이 모델링에 적용하기에도 좋아서 재밌게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세그웨이 다이나믹스를 state-space equation으로 표현하고 나면, 그다음은 컨트롤러를 설계해야 한다. 학부 3학년이던 당시에는 시스템 제어라는 과목에서 제어 이론의 기초를 배웠는데, PID제어의 기본적인 개념 정도만 배워보고 실제로 뭔가를 제어해 본 적은 없었다. 생전 뭔가를 제어해 본 적이 없어서 막막했는데, 아마도 이 경험이 연구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해 준 것 같다. 막막함에 구글링을 하며 논문도 찾아보고 네이버 블로그든 외국의 블로그든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뭐든 찾아보다가 LQR(linear quadratic regulator)로 제어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처음 보는 개념이라 이해하고 적용하겠다고 열심히 공부했다.
실제로 사람이 타고 움직일 수 있는 세그웨이를 만드는 일은 재미있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했다. 처음엔 세그웨이 본체를 어딘가에 올려두고 의도한 대로 제어가 잘 되는지 확인했지만 결국엔 사람이 직접 타보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나는 쫄보라서 초기엔 거의 타보지 않았는데, 동료가 타다가 그 큰 힘을 내는 모터가 제어, 통신, 단선 문제 등으로 갑자기 발산해 버리는 걸 보면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더군다나 손잡이부터 발받침까지의 직접 제작한 부분이 쇳덩어리에 모서리도 날카롭게 깎여있어서 실험 중에 세그웨이가 발산이라도 하면 비상정지 스위치를 누르려고 가까이 가기도 무서웠다. 만약 혼자 이 프로젝트를 했다면 무서워서 이렇게까지 실험해보지 못했을 텐데 나보다 용감한 동료들이 있어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를 찾고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약 1년 간 모두 합심한 끝에 마침내 교내 졸업 작품 격의 행사에서 포스터 발표와 함께 세그웨이를 타고 행사장을 돌아다니는 시연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몇몇의 사람들과 합심해서 무언가를 해내는 경험은 약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겪을 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강한 I 성향을 갖고 있는 내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들도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들을 한 마디로 줄이면 '나와 뜻이 맞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경험을 깊이 쌓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무언가 판단을 할 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게 된다. 의식적으로 유연한 사고를 하려고 하지 않으면 점점 깊어지는 경험만큼 가치관이나 사고방식도 굳어지게 된다. 어릴 때는 실제로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매번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고, 옆 친구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것을 같이 배우고 부딪치고 해결하며 유대감도 쌓이고 협동심도 강해질 수 있는 것 같다. 반면, 각자의 영역에서 내공을 쌓아온 사람들이 회사에 모여서 어떤 프로젝트를 같이 수행할 때는 각자 생각하는 정답이 다르고, 그 생각들이 틀린 것도 아니며, 각자의 문제해결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협업이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참 아이러니하다.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필요한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으면 금방이라도 프로젝트가 성공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마치 영화 어벤져스에서 개성이 뚜렷한 여러 히어로들이 서로 섞이지 못하고 문제가 더 꼬이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협업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간의 내 경험과 어벤져스가 어떻게 어셈블 했는지를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각 분야 전문가인 구성원 모두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모두가 반드시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표가 분명한 큰 도전 과제가 주어졌을 때 단합이 된다'는 것이다.
이 인사이트가 갖고 있는 조건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구성원 모두 경험하지 못한 도전적인 과제'이고, 두 번째는 '구성원 모두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전 과제'이며, 마지막은 '목표가 분명한 과제'라는 것이다. 각각을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단순히 어려운 과제를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 도전 욕구가 자극되는 과제여야 하고, 프로젝트 리더는 각 구성원에게 이것이 왜 개인에게 도전적이고 해 볼 만한 것인지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구성원 한 명이 '이거 이렇게 하면 쉽게 되겠는데?'라고 생각한다면 그 한 사람의 생각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쉬운 문제인데 이거 하나 해결 못해서 모두 쩔쩔매는구나'라는 시니컬한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이게 더 위험한 이유는 구성원 개인이 스스로를 쉬운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인식이 만연해지지 않도록 각 구성원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프로젝트 리더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도전적인 과제를 잘 선정해서 이 프로젝트가 왜 도전적이고 중요한지 구성원들에게 잘 설명해줘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다소 까다로운 것 같다. 회사의 각 구성원은 회사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각자 인생의 주인공들이다. 어릴 때는 재미와 열정 하나로 프로젝트에 몰두할 수 있었지만 점점 앞으로의 인생을 계획하고, 서로 다른 자신만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회사는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 자아실현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회사의 규모가 클수록 상대적으로 개인의 업무는 작게 느껴지기 때문에 내가 수행하는 업무가 왜 중요하고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체감하기 어렵다. 따라서 프로젝트 리더는 각 구성원에게 각자가 맡고 있는 역할이 프로젝트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역할을 맡고 있는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설명하고 격려해 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조건은 명료하다. 목표가 분명해야 사람들이 한 곳으로 자신의 능력을 쏟아부을 수 있다. 목표가 복잡하거나, 납득이 안되거나, 자주 바뀌거나 하면 각 구성원은 자신이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설령 처음 설정한 목표가 지나고 보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더라도 갑자기 바꿀게 아니라 분명하게 매듭을 짓는 시간이 필요하고, 목표를 바꾸는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목표를 바꾸어야 할 이유와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구성원들과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 실제로 전쟁통에서 맡은 바 역할을 하는 실무자들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행동할 수가 있다.
각 조건에 대해 계속해서 프로젝트 리더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나는 여기서 프로젝트 리더가 어벤져스의 닉 퓨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프로젝트 리더는 그 영화의 빌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벤져스 1편에서 뉴욕에 끝없는 외계인이 침공하는 도전적인 과제는 닉 퓨리가 아니라 로키가 의도한 것이다. 닉 퓨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히어로들을 모으는 역할을 한 것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각 분야 전문성을 판단할 수 있는 파트장 정도의 역할이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히어로 영화에서도 각 히어로가 빛나려면 매력적인 빌런이 등장해야 하듯이, 회사에서도 각 구성원의 역할이 빛나려면 매력적인 프로젝트 리더, 즉 팀장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매력적인 빌런은 히어로가 좌절을 느낄 만큼 힘들지만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수준의 위협을 가하는,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한 명의 프로젝트 리더가 떠안기에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하지 못하고, 모든 프로젝트의 구성원이 스스로 히어로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히어로 영화가 성공하지 못하듯 말이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최근 10년 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보여준 어벤져스 엔드게임 사가의 개별 영화의 빌런들이 전부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대부분 흥행을 했고 결과적으로 엔드게임에 가서는 모든 히어로가 빛나고 영화 역사상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생각해 보면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유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 보기로 하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나는 그 프로젝트에서 아이언맨 역할을 맡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