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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원 Oct 03. 2024

12. 이정표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 것들

길눈이 밝지 않다면 국립공원이 아닌 도립공원 같은 작은 산을 탈 때 길을 잃기 쉽다. 그런 길에서 나는 종종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산악회에서 길을 안내하기 위해 걸어둔 리본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 하나 없는 인적 드문 곳에서도 산악회의 이름이 적힌 리본을 발견하면 마음이 한결 놓인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을 법한 길도, 과거에 누군가가 걸었던 길이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가 가는 이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고,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길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아마 험준한 산을 한 번이라도 타본 사람이라면, 그들이 남겨둔 배려의 흔적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 것이다.


산을 많이 타본 것은 아니지만, 산을 오르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걷는 길에 남겨진 이정표들은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찾게 해 주고, 때로는 스스로를 의심할 때 위로나 응원이 되기도 한다. 마치 나보다 앞선 인생 선배들이 내게 이야기를 건네주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정표는 나 홀로 걷는 길도 마치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처럼 느끼게 해 준다.




09월 11일

순례길에서는 노란색 화살표를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어플도 있지만, 길가에 있는 노란 화살표나 사람들이 남긴 이정표들 덕분에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그래서 이 길을 마치고 난 뒤에도 노란색 화살표를 계속 따라가야 할 것 같았다.


파란색 순례자 표지판, 조개껍데기, 그리고 노란 화살표와 같은 표시들을 따라 순례길을 걸은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오늘은 그 이정표들을 따라 벨로라도(Belorado)까지 걸을 예정이다.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서 출발해 벨로라도로 향하는 길은 해바라기 밭으로 가득했다. 광활한 해바라기 밭을 보고 있자니, 내가 정말 이국적인 곳에 와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비록 해바라기 수확이 끝난 시기라 태양을 향해 노랗게 활짝 핀 모습은 아니었지만,  모든 일을 마치고 고개를 숙여 쉬고 있는 해바라기들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이 지루할 법도 했지만, 길 위에 놓인 이정표들과 앞서간 사람들이 해바라기들에 그려놓은 익살스러운 표정들 덕분에 길은 한결 덜 지루했다. 고개를 숙이고 활짝 웃는 해바라기들을 보며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의 작은 장난 속에 담긴 웃음이 참 좋았다.


벨로라도에 도착한 후, 골목마다 그려진 벽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벨로라도가 벽화마을이라는 후기를 통해

흔히 알고 있는 벽화마을이라 생각했지만, 집 한 면 전체에 순례자를 생각하고 그린 그림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800km의 이 길이 그저 지방의 작은 마을들을 거쳐가는 것이 아니라, 순례자들을 응원하고 축복하는 하나의 거대한 마을처럼 느껴졌다.



순례길을 마친 지 1년 후, 다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식과 함께 보내준 사진 속에는 1년 전 내가 보았던 이정표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국이나 도시에서는 1년이라는 시간이면 많은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맛있어서 다시 가고 싶었던 가게가 문을 닫기도 하고, 어느 집은 간판이 여러 번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순례길의 이정표들과 사람들의 발자국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조금 낡았을지라도 말이다.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들은 내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준다. 마치 나와 함께 걸으며 내 길을 응원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단순히 길을 안내하는 표식일 뿐인데도, 내 옆에서 조용히 응원의 소리를 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순례길을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1년 전에도, 5년 전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정표들 덕분일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은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한다. 변함없이 나를 맞아주는 것들이 있기에, 우리는 때로 혼자서도 함께 걷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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