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일지
어떤 해의 계절을 돌이켜볼 때 저마다 추억이 있을 것이다. 추운 계절에는 졸업식이나 새 학기의 설렘이 떠오를 수 있고, 여름은 더위를 피해 떠난 휴가지나 더위를 잊게 해 준 음식들이 기억에 남을 수 있다. 혹은 그 해 계절에 맞이했던 누군가의 생일과 이제는 함께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부재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각자에게는 그 계절에만 존재하는 소중한 추억과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2024년의 여름은, 나에게 달리기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유난히도 더운 폭염이 이어졌고, 모든 이가 덥다고 호소할 만큼 무더웠던 그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 나는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고, 무더운 더위에 태어나 생일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취업과 생일을 모두 제치고 내 기억에 깊이 남은 것은 오직 나만의 페이스로 달렸던 순간들이었다.
42.195km라는 거리를 뛸 수 있다고? 내 인생에서 아주 멀고도 먼 이야기 같았다. 순례길에서 최장거리였던 34km조차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으니, 그보다 8km나 더 길다는 마라톤은 상상조차 어려웠다. 걸어서 도달한 34km도 나에겐 꽤나 힘든 일이었다. 긴 거리를 제대로 쉬지 않고 오기로 걸은 탓인지, 족저근막염 증상이 악화되었다. 그래서 귀국 후에는 꾸준히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무리 내 몸이 튼튼하다 자부해도 42.195km는 절대적으로 힘든 거리였으며, 이전의 경험에서도 쉽지 않은 거리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봄에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니, 풀코스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의 마라톤까지는 8개월이나 남아 있었고, 그 시간 동안 준비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풀코스 마라톤을 뛰려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지 몰랐다. 마라톤 신청날은 정말 치열한 경쟁률이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나도 풀코스 마라톤을 신청할 수 있었다. D-228, 수능을 치른 지 10년이 지나 생겨버린 나의 디데이였다. 수험생 기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르지만, 이 디데이가 나에게 남겨준 여름은 아직도 반짝이며 추억되는 듯하다.
7월 26일 D-100, 누적거리 235km
6월 1일, 친구와 같이 참가한 10km 마라톤부터 뜨거운 여름의 시작을 알렸다.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선선하여 괜찮았지만 7월에 접어들고 나서부터는 조금만 뛰어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정말 머리에 수도꼭지를 틀어놓았다는 표현이 딱 맞아 들었다.
머리를 묶은 날엔 땀이 머리카락을 따라 줄줄 흘러내렸다. 아침과 저녁 시간을 활용해 하루에 두 번씩 운동했고, 집 앞에서 하프마라톤 거리를 뛰며 훈련을 하기도 했다. 새벽에는 헬스장에서 보강 운동과 짧은 거리 달리기를 했고, 저녁에는 퇴근 후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뛰어 하루에 10km 이상을 달렸다.
오늘은 7월이 채 끝나지도 않았지만, 235km를 달렸다는 숫자가 휴대폰에 표시되었다. 무언가에 몰두하여 푹 빠졌던 날들이었다. 벌써 마라톤이 100일 뒤였지만, 이 숫자를 보니 다가오는 풀코스 마라톤이 두렵지 않았다. 총 달린 거리의 마일리지가 마라톤 성공 지표가 된다고 말한다. 235km라는 객관적인 데이터는 내 흔들리는 마음을 고정시켜 주는 숫자였다.
8월 30일 D-65, 매일 15km
7월에는 정말 성실히 달렸지만, 8월에는 여름휴가와 여러 일정으로 인해 목표했던 거리만큼 달리지 못했다. 최소 200km를 뛰겠다는 다짐이었지만, 8월 마지막 주가 다가올 때까지도 130km를 넘기지 못했다. 다가오는 마라톤에 실패하게 될 나 자신이 상상되었다.
덜컥 드는 두려운 마음에 8월 마지막주에 매일 15km를 달려 200km를 채워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니었다. 격일로 뛰는 15km도 지치기 쉬운데, 이 삼복더위에 매일 15km를 뛰어야 했다. 그러나 단 5일 만이라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동기부여를 위해 새 러닝화를 샀고, 카본화의 뽀득뽀득 소리를 들으며 뛰었다. 어느 날은 7.5km 지점까지 달린 후에 다시 달린 거리를 반환해 돌아왔고, 어느 날은 5km 거리를 반복하여 15km를 채웠다. 조금이라도 질리는 기분이 들지 않게 뛰다 보니 어느새 수요일이 다가왔고, 오늘이 도전의 마지막 날이었다.
자주 찾는 집 앞 공원을 지나 오이도의 빨간 등대 근처까지 달렸다. 하루를 참으니 이틀을 보낼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이 쌓여 마지막 15km를 채웠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차오르는 날이었다. 퇴근 후 매일 15km를 달릴 수 있는 체력이 생긴 나를 보며, 8월의 여름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9월 29일 D-35, 30km LSD
추석 연휴 동안 하프 마라톤보다 더 긴 25km를 뛰어보았다. 그 경험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30km에 도전하기로 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기에 더 이상 장거리 LSD 훈련(*LSD, Long Slow Distance의 약어로 긴 거리를 천천히 달리는 것)을 미룰 수 없었다.
일요일 점심에 곧 있을 장거리 훈련을 위해 밥을 배불리 먹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4시쯤에 나가볼 생각이었다. 20km 정도까지는 중간에 물을 보충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었지만, 지난번 25km 뛰었을 때 갈증을 많이 느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는 급수를 위해 물에 에너지포를 섞어서 벤치에 두었다. 2km 정도 뛰었을까? 누군가 물을 가져갔는지 물통이 사라졌다. 물이 원래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갑자기 사라진 물을 보자 갈증이 계속 밀려왔다. 더불어 물러날 줄 모르는 이 햇빛과 더위가 괴로웠다.
3km 정도 되는 거리를 10번 반복하여 30km를 채울 계획이었다. 7번 정도 똑같은 거리를 달렸을 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편의점에 달려가 물을 한통 비워냈다. 물을 먹고자 잠시 멈추니, 갑자기 포기할까?라는 생각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리에 매우 무거운 추가 달린 기분이었다.
이 감각이 사람들이 때때로 말하는 '다리가 감긴다.'라는 것인가 싶었다. 심박수도 높지 않고 크게 지치는 느낌도 없었지만, 다리가 무거우니 아무리 속력을 내려고 해도 뛰어지지 않았다. 마치 온수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물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걸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포기라는 감정이 들 때마다 그동안 쌓아온 거리가 아까웠다.
그래서 오기로 달렸다. 그동안 달렸던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30km를 뛰기 위해 뛰었던 5km, 15km가 생각나 이제는 해가 저물어버린 깜깜한 공원을 계속 뛰었다. 29km를 뛰어도 마지막 1km는 참 힘들었다. 10km처럼 느껴지는 마지막 1km를 달려 결국 30km를 완주했다.
다 뛰고 나니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여기서 어떻게 12km를 더 달려서 42.195km를 뛰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여름 내내 단단해졌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저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 3시간 30분 동안 달려 지친 다리를 끌고, 해가 다 저문 밤에 집으로 터덜터덜 들어왔다. 아무리 달려도 마라톤은 쉽지 않았다.
10월 13일 D-21, 서울 달리기 하프마라톤
지난주 10km 마라톤에서 나는 올해 봄의 나를 뛰어넘었다. 48분 39초라는 기록으로, 지난봄의 55분 08초보다 약 7분이나 빨랐다. 여름 내내 땀에 흠뻑 젖으며 달린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50분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했던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 10km 마라톤을 끝내고 일주일이 지났다. 지난주에 보였던 나의 성장을 느끼며, 오늘의 하프마라톤도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서울 달리기 마라톤은 가을에 열리는 풀코스 마라톤을 앞둔 사람들의 모의고사와 같다고 했다. 풀코스의 절반을 달리며 여름 내내 쌓아온 자신의 노력을 시험 치를 수 있는 날이었다.
10월이라면 쌀쌀해야 하지만 올여름은 끝나지도 않았는지, 가을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크게 몸을 풀지 않아도 몸이 굳지 않았다. 올해에만 6번의 마라톤을 참가했기에 오늘 마라톤도 부담되는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모의고사에 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페이스를 자주 확인하며 뛰었다. 첫 번째 경사구간을 지나가니 그 이후로는 평지가 계속되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청계천 옆을 뛸 때에는 분명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경사가 느껴졌다. 후에 들어보니 이 언덕은 평소 걸을 때는 모르지만, 뛸 때만 느껴지는 이상한 경사라고 한다.
그 이상한 경사를 지나 반환하니 약 5km 정도가 남았다. 페이스를 보며 무리해서 뛴 탓인지 다리가 무거워지는 듯했다. 그때 페이스메이커(*Pacemaker:중거리 이상의 달리기 경기에서, 기준이 되는 속도를 만드는 선수) 분이 눈앞에 보였다. 그분은 자신의 페이스를 알려주며, 사람들을 응원했고 피니쉬 라인에 가까워지자 본인을 앞질러 질주하라며 소리치셨다.
그분의 힘찬 목소리에 마치 회초리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처럼 마지막 힘을 짜냈다. 이미 지쳤다고 생각했던 다리도 어느새 속도를 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결국 1시간 49분 42초라는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에 도달했다. 목표로 했던 1시간 50분 이내 완주를 이루어낸 순간이었다.
오늘은 나의 모의고사 날이었다. 목표했던 기록을 달성했고, 비록 3주 후에 오늘 뛴 거리를 다시 한번 달려야 하지만, 마음은 개운하기만 했다. 풀코스를 완주한 것도 아닌데, 그동안 달려온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10월 27일 D-7, 일주일을 앞두고
지난주 마지막 장거리 훈련으로 하프마라톤 거리를 달렸다. 그 훈련을 끝으로 여름 내내 이어진 나의 훈련을 마무리했다. 요즘은 점차 훈련량을 줄여가고 있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거리를 줄이며 조깅만 하고, 평소보다 잘 챙겨 먹는 한 주가 될 것이다.
매달 200km를 넘게 달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라톤 날짜가 다가올수록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커져만 갔다. 느리게 달리는데도 너무 힘들게 느껴졌고, 평소보다 몸이 무겁게 느껴져 그동안 마라톤에서 어떻게 그 속도로 달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10월에 참가했던 10km 마라톤과 하프마라톤에서 자주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혹독한 자기 채찍질일지 모르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이러려고 여름에 훈련한 거야?’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지치면 더 속도를 낼 수 있었고, 매 대회마다 개인 최고 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도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달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훈련량을 갑자기 줄여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의문이 쌓여 다른 마라톤 참가자들은 어떤지 자주 살펴보게 되었다.
다양한 러너들을 보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기도 했고, 나와 달리 마지막까지 열심히 훈련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보며 안심되기도 하고, 반대로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의심을 접어둘 때다. 그저, 덤덤하게 다가오는 마라톤을 마주할 시간이다.
D-DAY 228은 어느새 7로 줄어들었다. 뜨거웠던 여름, 나만의 페이스로 꾸준히 달렸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 않고 30도 땡볕 아래서도, 폭우 속에서도 핑계 없이 달려왔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수능을 치른 지 10년이 지나 나의 두 번째 수능날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