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살, 고아가 되던날

아빠와의 마지막 여행, 카우보이 모자 속 미소

by 작가 앨리스

아빠와의 마지막 여행, 그리고 남겨진 추억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빠와 나, 우리 둘만의 시간이 시작됐다. 아빠는 늘 강인하고 절제된 분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는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했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지방에서 일하느라 바빴고, 오빠들은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결국, 집에는 아빠와 내가 남았다. 문제는, 내가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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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입맛은 까다로웠다. 도가니탕, 소고기무국, 조기, 불고기 같은 전통적인 한식 반찬을 좋아하셨지만, 막 대학을 졸업한 나로서는 그런 음식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다. 요리책을 뒤적이며 "갖은 양념"이라는 말에 머리를 쥐어뜯고, 불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익숙지 않은 솜씨로 끓인 국을 식탁 위에 올리곤 했다. 아빠는 그 밥을 묵묵히 드셨다. 때로는 반찬가게에서 사온 음식을 상에 올렸지만,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드셨다. 그 순간에도 나는 아빠가 속으로는 엄마를 얼마나 그리워하실까를 헤아려보며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결심을 했다. "아빠와 여행을 떠나보자." 엄마가 없는 우리 둘만의 시간 속에서, 아빠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드리고 싶었다. 1993년 여름, 나는 아빠와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여행길은 설렘과 서툰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고향 친구와 그의 어머니도 동행해 네 명이 함께한 여행은 내겐 작은 기적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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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따가운 햇살 아래, 아빠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말 위에 앉아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활짝 웃으셨다.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마음속 한 구석에 깊이 박혀있다. 성산일출봉을 오르던 날, 우리는 땀에 흠뻑 젖었지만 해녀의 집에서 먹은 전복죽 한 그릇에 세상이 다 정겨워졌다. 아빠는 어린아이처럼 신나하셨다. 그때의 환한 웃음이 우리 둘만의 추억으로 남았다. 그 여름이 아빠와 나, 둘만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시간이 흘러, 아빠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밤새 이어지는 기침 소리는 점점 깊어졌고, 병원을 오가는 일이 잦아졌다. 폐암 3기라는 진단은 우리 모두를 아프게 했다. 하지만 아빠는 고통 속에서도 담담한 얼굴로 나를 대하셨다. 내가 결혼한 후, 큰언니 부부가 아빠를 모시게 되면서 나는 가끔씩 아빠를 찾아뵙곤 했다. 어느 날, 아빠가 좋아하시던 명란젓과 굴비, 딸기를 잔뜩 사 들고 집에 갔을 때였다. 아빠를 부르며 들어갔는데, 아빠는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언니가 119를 부르고 병원으로 향했지만, 아빠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셨다.



아빠의 장례식은 그 해 새해 첫 주에 열렸다. 1월 3일, 매서운 눈보라와 칼바람이 몰아쳤다. 친척들은 "아버지 성격이 예민하셔서 이 추운 날을 골라 가셨다"는 말로 웃음을 섞었지만, 그 바람과 눈 속에서 나는 그저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엄마 곁에 아빠를 안장하며 나는 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엄마와 잘 지내세요. 저는 이제 제 길을 가볼게요."



33살, 나는 고아가 되었다. 부모님 모두를 떠나보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빠와 함께한 추억들이 나를 단단히 지탱하고 있음을 느낀다. 요리책을 붙들고 서툰 솜씨로 밥상을 차리던 순간, 제주도에서 환하게 웃으시던 아빠의 모습, 마지막으로 내 손을 잡아주시던 그 따스한 온기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후로도 삶은 계속되었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내로, 그리고 여전히 아빠의 막내딸로 살아가고 있다. 아빠가 내게 보여주신 강인함과 따스함은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 곁에 없지만, 나는 그들의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도 씩씩하게 내 삶을 걸어간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함께 계신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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