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에서 외친 꿈

고3을 향한 겨울 극기 훈련

by 작가 앨리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아침, 운동을 하며 퍼뜩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다. 그때도 이렇게 눈이 많이 왔었지. 고2 겨울방학, 담임선생님께서 "이 방학만 지나면 고3 지옥문이 열린다"며 정신 무장을 하라셨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제안된 건 겨울산행.

"걷기도 힘든데, 겨울에 등산이라니? 말도 안 돼!"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심드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제안이 '선택'이 아니라 '거의 필수'라는 것이었다.


우리 1반 담임선생님은 이름도 멋진 한동한 수학 선생님이었다. 작은 체구에 다부진 몸매, 여고생들을 휘어잡는 유머와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셨다. 그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우리는 단체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한동안 뜸~ 했었지~ 웬일인가 궁금했었지~"

학생부장까지 맡고 계셨던 그는 엄격하지만 유쾌한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그런 선생님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그의 무서움을 알았기에 노래 부를 때만 대담할 수 있었다.


학교는 입시 성과를 위해 1반(이과)과 10반(문과)을 특별반으로 운영했다. 1반은 한동한 선생님, 10반은 국어 선생님인 우 OO 샘이 담임이셨다. 학교에서 수학을 강조했던 만큼, 1반의 우리는 매달 100장짜리 무지노트를 빼곡히 수학 문제로 채워 내야 했다. 못 채우면? 손바닥이나 종아리가 따끔해졌다. 그렇게 쌓인 노트들은 결국 화목난로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런 군기 바짝 든 반에서, 담임께서 직접 "정신 무장을 해야 한다"며 겨울 극기훈련 – 치악산 등산을 제안하셨다. 지원자를 받았지만, 사실상 반강제였다.


1반과 10반에서 자원한 6명의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 두 분. 총 8명이 치악산으로 떠났다. 엥, 지원자가 얼마 없네. 아마도 부모님께서 반대하셨으리라. 기차역에서 만난 우리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야, 이거 여행이야? 아니면 훈련이야?"

"뭐 어때, 일단 가서 재밌게 놀자!"

하지만 치악산에 도착하자마자 깨달았다. 이건 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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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 근처의 민박집은 오래된 시골집이었다. 천장은 낮고, 방 가장자리에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집 안에는 구수한 된장 냄새가 가득했다. 민박집 아주머니께서 차려주신 저녁밥상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 후, 우리는 잠이 오지 않았다.

"선생님, 첫사랑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 첫 사랑 하면 역시…"

우리는 선생님들을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겨울밤을 보냈다. 그날 들었던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는 아련하면서도 코믹했지만, 지금도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따뜻한 분위기만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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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우리는 등산을 시작했다. 나는 큰언니 덕분에 등산화를 신고 갔었는데,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

겨울산은 그야말로 하얀 나라였다. 눈이 소복이 쌓인 숲 속은 아름다웠지만, 바람은 매섭게 얼굴을 후려쳤다.

"야, 이거 얼굴 싸대기 맞는 느낌인데?"

"맞아, 너무 아파!"

추위에 발가락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기어이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풍경만이 아니었다.

"너희들 너무 추우니까 따뜻한 물 좀 마셔라."

한샘께서 건네주신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이건… 물이 아니었다. 목구멍이 찌르르하게 뜨거워지며, 몸이 순간 후끈 달아올랐다.

"선생님, 이거 설마…"

"체온 올리는 데 직빵이지!"

지금 생각하면 독한 양주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따뜻한 물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정상에서 각자의 꿈을 외쳤다.

"OO대 합격! OOO 학과 가고 싶어요!"

그리고, 보상처럼 꺼내든 초코파이를 우걱우걱 씹었다. 달달한 초코파이 여전히 맛있지만, 그때만큼 맛있던 적은 없었다.


등산보다 더 큰 도전은 하산이었다. 눈 덮인 가파른 길을 내려가는 것은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꺼낸 비장의 무기.

"비료포대 가져왔으니까 이거 타고 내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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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포대 속에 지푸라기를 넣어 즉석 썰매를 만들고, 한 명씩 그 위에 올라탔다.

"자, 출발!"

휘리릭—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우리는 썰매를 타고 내려가다 돌에 걸려 튕겨 나가고, 나무뿌리에 걸려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이거 재밌는데?"

"아니, 너무 아파!"

온몸이 얼얼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신났다.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웃으며 말씀하셨다.

"집에 가면 꼭 목욕탕 가서 엉덩이 멍 몇 개 들었는지 세어와라! 멍이 제일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걸 준비했지!"

그리고 우리는 정말 목욕탕에 갔다. 거울 앞에서 엉덩이를 확인한 순간…

"야, 나 푸르뎅뎅해!"

"헐, 이거 뭐야, 완전 전쟁터인데?"

엉덩이와 허벅지엔 커다란 멍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멍조차 자랑스러웠다.



함께 치악산을 올랐던 친구들은 지금도 연락하면 한바탕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이다. 몇 명은 원하는 대학에 갔고, 몇 명은 재수를 했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그때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나는 치악산에서 함께했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 반의 주제가였던 그 노래가 귓가에 맴돈다.

"한동안 뜸~ 했었지~ 웬일인가 궁금했었지~"

하고 노래 부르면 "이놈들, 정신 안 차려?" 하고 나타나실 것만 같다.

'한샘, 보고 싶어요. 건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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