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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Jan 19. 2023

글쓰는 찰나 - 이별 후에

너는 나랑 안 어울려. 그 아이의 이 한 마디 말과 함께 3년간의 순정이 무너진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소주를 마셨다. 


엄마 아빠가 잠들기를 기다려 찬장 깊숙이 있던 소주 한 병을 꺼내서 내 방으로 숨어 들었다. 한강에 앉아 깡소주를 마시던 티비 속의 배우처럼 소주병에 입을 대고 소주를 마셨다. 마치 이 날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나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역시, 쓰네. 인생은 이렇게 쓰다고 했었어.


나도 드디어 어른이 되는 단계의 첫 발을 내디딘 것 같았다. 눈물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왜인지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미지근한 소주는 정말 지독하게 썼지만 취기는 오르지 않았다. 새벽으로 흘러가는 시간 동안 소주의 맛이 남은 입 안의 감각에 집중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잔잔했고 음울했다. 잠을 밀어내고 술이 아닌 무언가에 취했던 18살의 그 밤, 나는 이별 후를 즐기고 있었다.   

   

항상 교실 뒤편에서 삐딱하게 앉아 있던 까만 얼굴의 그 아이는 내 동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나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있는 듯한 자유로운 느낌의 그 아이가 좋았다. 말 한 마디 먼저 걸어 보지 못한 채 마음만으로 이야기를 쓰던 시절이었다. 반딧불이 반짝이는 시골밤을 함께 걷는 영화 클래식의 한 장면뿐 아니라 서로를 애절하게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이별 장면도 나의 상상 속에 늘 있었다. 사랑은 이별을 늘 꼬리표처럼 달고 오는 거니까. 진정한 사랑이라면 이별도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솔직한 발언이 나는 차라리 반가웠다. 실연 당한 여주인공의 마음을 느껴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연기를 했다.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고 싶었던 철없는 마음이었다. 나의 첫 이별은 이렇게 가짜였다.   

  

  진짜 이별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찾아왔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시작된 만남은 5년 넘게 이어졌다. 성인이 된 후 경험한 모든 기억에는 그가 있었다. 어느새 내 삶에 깊숙이 들어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느낄 때쯤 그는 이별을 통보했다. 이제 더이상 이별을 상상하지 않았는데 ‘진짜’ 이별을 당하게 되었다. 임용 시험을 한 달 정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왜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한 달만 기다려 주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서로를 위해 그럴 수 없다는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는데 그는 닦아주지 않았다. 그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거리를 걸을 수도 없었다. 얼마나 많은 곳을 함께 다녔던지 그의 기억이 없는 곳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시간이 흐를수록 알 수 없었다. 


며칠을 헤매다 즉흥적으로 본가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등 뒤로 점점 서울이 멀어지는 것을 보자 이상하게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내 마음을 서울에 묻고 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집 근처 대학 도서관으로 갔다. 은행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대학 캠퍼스는 온통 노란 빛깔이었다. 그해 가을은 유독 날씨가 좋았다. 따뜻한 햇살과 짙은 하늘, 눈이 시리게 노란 빛들을 보았다. 아무런 감상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집과 대학 도서관 그리고 도서관 앞 은행나무들만으로 채워진 하루들을 반복했다. 성인이 된 후 가장 단순한 나날들이었다.      


규칙적인 하루 일과 속에 평화가 조금씩 깃들었다. 그냥 나의 할 일을 매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별 후에 슬픔에 젖어 시험을 망치고 후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일이지만 혼자서도 나는 나의 할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시험을 봤고 나는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     


가슴이 텅 비어 있었던 그 시절의 마음을 기억한다. 나의 이별 방식이 소주나 눈물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감정은 흘러가는 시간에 맡기고 하루하루 나의 할 일을 하는 것이 나의 해결 방법이었다. 마음의 근육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 자책이나 원망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자책이나 원망이 더이상 나를 너무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거대하게 밀려올 때면 잠시 생각을 멈추고 해야 할 일을 한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린다. 밀려 있던 책 정리를 하고 헌 옷을 버린다. 조금 외롭고 힘들더라도 내 할 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가 기특해진다. 그 힘으로 나를 괴롭히는 감정에 직면할 용기를 낸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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